[인천둘레길 12코스] 싸리재와 자유공원, 개항장거리의 한국 근대사를 만나는 길

2021. 8. 27. 06:21+ 카메라를 들고 떠나다/걷기좋은길

[인천둘레길 12코스]
자유공원과 송월동 동화마을, 차이나타운과 개항장거리를 걷는 성창포길

둘이가는 산악회 / 걷기좋은길
인천 인현동 ~ 북성동

Photographed by BayZer™

2021.08.22

 

 

 

인천둘레길 홈페이지 참조

 

 

 

오늘의 코스 지도
동인천역 - 배다리사거리 - 인천우체사터 - 애관극장 - 답동성당 - 신포국제시장 - 감리서터 - 백범김구 역사거리 - 홍예문 - 자유공원 - 송월동 동화마을 - 차이나타운 - 해안성당 - 대불호텔전시관 - 인천여자경찰서 옛터 - 각국조계지계단 - 인천시민애집 - 제물포구락부 - 최초 플라타너스 - 석정루 - 삼국지벽화거리 - 짜장면박물관 - 인천역
* 총 6.99km (3시간11분 소요, 휴식, 촬영시간 포함)
* 주차 : 수도국산 달동네박물관 (동인천역까지 0.57km, 도보로 6분 소요)

 

 

 

 

동인천역 (출발지점)

Dongincheon Station
인천광역시 중구 참외전로 121 (인현동 1-613)


 

동인천역
12코스의 출발지점인 동인천역의 최초 역명은 축현역이었다고 한다. '축현'은 싸리재를 한자로 표기한 것으로 이 일대가 싸리나무로 울창했다는걸 알수 있다.
북광장 4번출구로 나오면 바닥에 그려진 둘레길 안내가 있는데 이것은 14코스의 역방향이 표시된 것이다.

 

 

 

경인선 초기 공사현장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는 1897년 3월22일 우각현 (지금의 도원역 부근)에서 착공하여 1899년 8월18일 제물포역 (현 인천역) ~ 노량진역 간 33km로 개통된 경인철도이다.
당시 개통된 역은 제물포 - 축현 - 우각동 - 부평 - 소사 - 오류 - 노량진의 7개 역이었다. 경인선의 완공은 도로로 12시간 걸리던 것을 1시간 30분으로 줄이면서 서울과 인천이 1일 생활권으로 변하는 계기가 되었다.

 

 

 

모갈 1호
당시 이 기차의 이름은 '모갈 1호'였는데 모갈(Mogul)은 '거물' 또는 '거인'의 뜻이었지만 발음이 낯설어 사람들은 모갈이라고 부르기보다는 그냥 불을 때서 가는 기차라 하여 <화차> 혹은 <화륜거>라고 하였다.

 

 

 

중앙시장

Jungang Market
인천 동구 중앙로 68 (송현동 100-12)


 

전통혼수거리
06:20분, 동인천역을 마주하고 좌측에 위치한 전통혼수거리로 들어서면서 12코스를 시작한다.
입구 바닥에 12코스 안내가 그려져 있다. 이른 시간이라 아직 점포들이 문을 열지는 않았다.

 

 

 

10시가 넘어야 하나둘 문을 연다고 말씀해 주시는 한 점포의 사장님,
이곳도 코로나 여파로 상당한 어려움을 겪고 있어 문을 닫은 집들이 많다고 하신다.

 

 

 

학창시절 양키시장으로 불렀던 송현자유시장, 송현동 순대골목도 가까운 거리에 있다.

 

 

 

중앙시장에는 한복점과 이불, 혼수전문 가게들이 많다.
걸이대에 그대로 둔채 셔터문이 내려져 있는 어느 가게 앞, 문을 연 가게의 윈도에는 색깔도 고운 한복들이 진열되어 있다.

 

 

 

싸리재

Sarijae Hill
인천 중구 개항로


 

배다리사거리
전통혼수거리가 끝나는 지점에서 우측으로 둘레길이 이어진다.
배다리는 바닷물이 들어오면 수로를 통해 철교 밑까지 배가 드나들었다 해서 유래된 이름이라고 한다. 배다리 헌책방골목도 도로 건너에 위치해 있다. 횡단보도를 건너 옛 싸리재길로 12코스가 이어진다.

 

 

 

싸리재 고갯길
이 길은 웨딩, 가구거리로 불리는데, 지금은 가구점들이 문을 많이 닫았다.
애관극장 앞이라고 해야 통하는 경동 사거리를 1960년대까지만 해도 싸리재라 불렀다. 당시 배다리에서 경동파출소에 이르는 고개로 싸리나무가 많아 싸리재고갯길로 불렸는데, 일찍이 개화한 내동 상계에 연달아 성장하기 시작했다.

 

 

 

원용연 작가 (2014), 월미도등대길에서

1900년대 철도가 개통되기 전에 제물포에 상륙한 사람들이 서울을 가려면 배로 한강을 올라가거나 말 아니면 가마를 타고 반드시 이 싸리재를 넘어야 했기에 많은 사람들과 상권이 발달된 곳이었다.
원래는 높은 고개였는데, 우마차 통행을 위해 두차례나 고개를 깎았다고 한다. 이곳을 지나 11코스에서 걸었던 우각리(쇠뿔고개)를 통해서 서울로 나가는 길이 이어졌다.

 

 

 

싸리재 카페
80년전 일본식으로 지어진 건물을 개조해 생활공간과 카페로 분리해 새롭게 문을 열었다.
이 일대는 역사성을 지닌 옛 건물들이 많이 남아 있는 곳이지만 현재는 하나둘 사라지고 재개발이 추진되고 있어 거리 자체를 문화재로 지정, 보존할 필요가 있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인천기독병원
1931년 인천부인병원으로 개원한 이곳은 일제때 접대부 검진소로 사용되기도 했으며, 일본 패망 이후 미군은 정보기관 사무실로 사용하기도 했다.
이 일대가 번창했던 이유는 1952년 기독병원이 설립된 이후 개인병원과 약국들이 생겨나면서 인천의 의료타운과도 같았고, 약국이 드문 시골에서는 이곳까지 먼 걸음을 해야했다.

독일보청기 자리는 경인간 최초의 전화 개통지라고 한다.

 

 

 

이운사터
개항 이후 정부는 전운국을 설치하고 미곡운송을 위해 근대식 기선을 도입 하였으나 경영에 어려움이 많았다. 이운사는 1893년 세미 운송과 여객 수송을 위해 인천에 설립한 민관합작 해운사로 우리나라 근대 민간 해운업의 효시이다.

인천우체사터
근대 우편제도는 1884년 우정총국 설립으로 부터였지만 이후 갑오개혁의 일환으로 다시 시작하였다. 1895년 당시 한성은 통신국 내에 한성우체사를, 인천에는 이운사 내 설치하여 우편업무를 동시에 시작했다.
현재는 건물이 헐리고 공영주차장으로 바뀌었다.

 

 

 

애관극장

Aegwan Cinema
인천 중구 개항로 63-2


 

우리나라 최초의 실내극장, 애관극장
애관극장이 보이는 지점에서 좌측 귀빈 골목으로 둘레길 로고가 안내를 하고 있다.
잠시 애관극장을 둘러보면,,
애관극장은 1895년에 지어진 우리나라 최초의 실내극장으로, 서울 정동의 협률사(1902년)보다는 7년, 종로 단성사(1907년)보다는 12년이나 앞서는 역사적 의미가 있는 극장이다.
1895년 공연장인 협률사로 시작해 (서울 정동의 협률사와는 한자가 다르다) 1911년 축항사, 1925년에 애관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지내온 세월만큼이나 극장 외관도 많이 변해 있었다.

 

 

 

극장에서 관리부장으로 일하시던 이인갑 옹께서는 6.25전쟁때 영사기를 극장 뒤에 묻어 두었다가 인천상륙작전때 폭격으로 소실된 극장을, 휴전 후 그 자리에 다시 지어 극장을 열수 있었다고 영웅담처럼 말해주곤 하셨다.
현재는 코로나로 인한 경영난으로 폐업 위기에 놓여있고, 한 건설사에 매각설까지 나돌고 있다. 이에 인천 시민들은 추억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이곳을 지키기 위해 서명운동을 하고 있고, 문화단체와 110명의 지역 인사가 참여했다고 한다.
인천시에서는 애관극장이 공공자산으로 보존할 역사성과 상징성이 있는지 객관적 결과를 확보한후 공공 차원에서 매입할지 올해 11월까지 결정할 것이라고 한다.

 

 

 

극장가의 산증인인 이인갑 옹께서는 2015년 94세에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나와는 각별한 인연이 있었던 어르신이시다.
보통학교 2년을 다닌후 배는 곯지 않는다기에 애관에 발을 들여 놓았는데 당시 나이 9살이었다. 나팔을 불고, 골목이나 가게 유리창, 담장마다 영화포스터를 붙이고, 극장의 온갖 궂은 일은 도맞아 하시며 은퇴하실 때까지 평생 애관을 위해 살아오신 분,
어르신은 전국의 모든 극장을 무료로 들어갈수 있는 기장증을 가지고 계신 분이셨다.

 

 

 

인천자모원
귀빈 골목으로 들어와 인천자모원에서 좌측으로 가면 답동성당이 있다.
이후에 답동성당에서 나가는 길이 아파트공사 가림막으로 막혀 있어 둘레길이 끊기게 되니 이곳으로 다시 와 박문유치원 앞으로 지나가야 한다.

 

 

 

답동성당

Dapdong Catholic Church
사적 제287호
인천 중구 우현로50번길 2 (답동 3-3)


 

인천교구청

 

 

 

답동성당
06:48분, 보기만해도 경건해지는 듯한 답동성당에 도착했다.
성당의 평면은 십자형으로 붉은 벽돌을 주재료로 하고 중요한 곳에는 화강암을 사용하였다. 현재의 건물은 1937년 기존 건물의 외곽을 벽돌로 쌓아 올리는 개축공사를 완공하면서 아치 형태가 많은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변형한 것이다.

 

 

 

답동성당은 인천지역 천주교회의 역사와 그 시작을 같이 했다.
1889년 프랑스 파리 외방전교회 빌렘(J.Wilhelm) 신부가 초대 본당 신부로 부임하면서 답동 언덕에 성당의 초석을 놓는 정초식을 가졌다. 이후 코스트(E.Coste) 신부의 설계로 1897년 뾰족한 첨탑이 특징인 고딕 양식의 건물을 세웠다.

 

 

 

정면의 중앙과 양 옆으로 출입구가 있고, 가운데 출입구 위로 장미꽃 모양의 창을 설치했다.
건물 중앙에 큰 탑을 두고 경사진 지붕을 날개로 단 다음 끝부분에 장식적인 작은 탑을 두었다.

 

 

 

6월항쟁 기념비
성당 앞마당 우측에는 6월항쟁 30주년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촛불로 잇는 6월 항쟁
민주주의
여럿이 함께 가면 험한 길도 즐겁다.

호헌철폐! 독재타도!
1987년 6월 인천에서 울려 퍼졌던
'그 때, 그 자리, 그 사람들'의
민주주의를 향한 뜨거운 외침을 기억합니다


2017.6.10

 

 

 

신포국제시장

Sinpo International Market
인천 중구 신포동 6-6


다시 박문유치원 길로 내려와 그 앞을 지나 도로까지 나가면 건너편에 신포국제시장이 보인다.

 

 

 

신포국제시장
06:59분 도착,
시장 입구 바닥에 둘레길 안내가 그려져 있고, 로고와 리본이 여기저기 걸려있어 이 길로 안가면 안될것 같은 느낌을 준다. 해물과 생선을 파시는 할머니만 아침부터 홀로 바쁘실뿐 중앙시장처럼 이곳도 아직은 문을 열지 않았다.

 

 

 

이전에 폰으로 담아두었던 시장 풍경,
인천 개항 이후 형성된 전통시장으로 개항기때 외국 문물이 수입되는 창구 역할을 했던 곳이다. 오늘날에는 닭강정으로 유명해져 많은 이들이 찾는 인천의 명소가 되었다.

 

 

 

시장 끝부분 쯤에 왼쪽으로 들어가면 신포시장과는 어울릴것 같지 않은 횟집이 있고, 그 앞에 등대쉼터가 있다.

 

 

 

시장을 벗어나면서 우측으로 가야 한다. 왼쪽 중국식 만두를 파는 곳 문뒤에 둘레길 로고가 달려있어 쉽게 찾지 못하고 어디로 가야할지 잠시 망설였던 곳이다.
기업은행이 있는 삼거리에 금새 도착하게 되고 다시 왼쪽길로 간다.
둘레길 로고가 왼쪽을 가리키는 방향은 없나보다. 다른 길에서도 이렇게 뒤집어서 왼쪽 방향을 표시하고 있는걸 종종 봤었다.

 

 

 

다른 분들 코스를 보니 저 앞에 보이는 지구본에서 우측으로 간다는 글이 많았다.
실제 가보니 지구본까지는 가지 않고, 휴대폰 매장을 끼고 우측으로 가야 한다. 그냥 지나가다 입구 반사경에 리본이 달려있어 알게 되었는데 안쪽에 로고도 매달려 있는게 보였다.

 

 

 

인천 감리서터

The Site of Incheon Gamliseo
인천시 중구 내동 83


청년 김구의 탈출 일화로 유명한 감리서 터
현재 한진스카이타워 아파트 일대의 부지는 1883년 8월19일 인천 개항장의 통상업무를 취급하기 위해 인천감리서를 설치했던 곳이다. 1985년 3월부터는 이곳에 개항장 재판소가 설치되어 개항장의 재판권을 행사하였다.
인천 개항장 재판소는 22살의 청년 김구가 '치하포사건'으로 압송되어 재판을 받고 복역하던중 탈출한 일화로 널리 알려진 곳이기도 하다.

 

 

 

정면에 보이는 건물은 인천중부교회로, 둘레길은 그리로 이동후 오른쪽으로 올라간뒤 바로 왼쪽으로 길이 이어지게 되어 있다.

 

 

 

인천중부교회
교회 앞에서 우측 오르막길로 간뒤 교회를 끼고 바로 좌측으로 둘레길 정식 코스가 이어진다.
아래사진처럼 내리막길을 내려가면 지구본이 있는 곳이 나오는데, 내려가보니 이 길은 청년 백범 김구 역사거리가 조성되는 중이었다.

 

 

 

청년 김구 역사거리

Kim Gu Historic Street
인천 중구 신포로 39 (송학동3가)


 

청년 김구 역사거리 입구
코스를 벗어나 잠시 내려와보니 입구에 세워져 있는 김구 역사거리 안내가 보인다.
백범 김구와 인연이 있는 인천감리서 터 주변을 정비하고 신포로 약 200m 구간에 인도와 공공 조형물을 설치해 테마거리를 조성하는 사업이다. 내려오면서 군데군데 공사중인걸 확인할수 있었다.

 

 

 

종합안내도
단 두차례에 걸쳐 인천에서 겪은 수감생활중 김구 선생은 민중과 고통을 함께하는 불굴의 민족 지도자로 단련되었다.
대한독립을 위해 앞장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이끌었던 김구의 인천에서의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김구와 교감하다
우리의 작은 목소리를 모아 김구에게 전달한다는 취지로 설치되었다. 알록달록한 파이프에 간직하고 있는 소원을 김구에게 말해보자.

 

 

 

첫번째 수감
조롱을 박차고 나가야 진실로 좋은 새이며
그물을 떨치고 나가야 예사스런 물고기가 아니리
충은 반드시 효에서 비롯되니
그대여, 자식 기다리는 어머니를 생각하소서

- 김주경이 보낸 탈옥을 권유하는 5언절구

 

 

 

인천의 조력자들

김주경
강화출신의 무관으로 청년 김구의 열렬한 지지자이자 후원자였다.
김구 부친과 모친을 번갈아 가며 모시고, 법무대신 한규설을 만나 김구의 석방을 위해 노력하다가 요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자신의 재산을 풀어 법부에 소장을 올리며 가산을 탕진하기도 했다.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자 김주경은 청년 김구에게 탈옥을 권유하는 위문편지를 보내고 망명길에 올랐다.

유완무
인천 지역에 용감한 청년 및 사람을 모아 청년 김구를 감옥에서 구출해내는 계획을 세웠으나 거사 사흘 전에 김구가 다른 죄수들과 탈옥하는 바람에 실행에 옮기지 못하였다.
그는 후에 김창수라는 이름을 김구로 고쳐주었고, 김구는 유완무를 평생친구라고 백범일지에 기록했다고 한다.
을사보호조약 체결 직후 김구보다 앞서 북간도로 망명해 민족운동을 전개하다가 피살돼 두사람은 다시 만날수는 없었다.

박영문, 안호연
인천 신상협회 창립 멤버로 인천항의 유명한 물상객주였던 박영문은 청년 김구의 어머니가 옥바라지를 할수 있도록 거처와 일을 마련해 주었다.
안호연 역시 김구와 모친을 극진한 정성으로 대하였다.

 

 

 

가로등마다 노역의 현장이 표현되어 있다.
인천중부교회 앞을 지나 오르막길 끝에 다다르면 내동예배당이 있으니 거기까지만 갔다 오는걸로~~

 

 

 

내동 예배당

St.Michael's Anglican Church
인천시 유형문화재 제51호
인천시 중구 개항로 45번길 21-32 (내동)


 

대한성공회 인천내동교회
한국에서 최초로 건립된 성공회 성당이다.
영국 해군 종군신부였던 고요한 주교가 선교 통역자 6명과 함께 1890년 인천항에 도착하였고, 1890년 9월29일에 성당을 건축하며 선교활동을 시작하였다. 1902년에는 러시아 영사관으로 이용되었고, 1904년에는 성공회 신학원으로 이용되었으며, 한국전쟁때 훼손된 부분을 수리하였고 1956년 6월23일 복원하였다. 

- 지식백과

 

 

 

상우재
다시 인천중부교회 옆 둘레길 코스로 돌아왔다.
인성여중 방향으로 걸으며 상우재라는 게스트하우스를 지나간다.

 

 

 

정면에 위치한 인성여중 앞에서 우측 오르막길로 가면 홍예문이 보이기 시작한다.

 

 

 

홍예문

Hongyemun Gate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49호
인천 중구 송학동3가 8


 

홍예문

07:22분 도착.
무지개처럼 생긴 문이라는 의미의 홍예문은 제물포항에서 경인철도 축현역 (지금의 동인천역) 쪽을 관통하는 문이다.
인천 시내를 남북으로 갈라놓은 메무리고개에 잘록한 골짜기를 뚫어 만들었다. 제물포항과 축현역을 왕래하려면 이 고개를 넘어야 했다.

 

 

 

공사는 일본군 공병대가 맡았으며 처음에는 혈문이라고 불렀다. 일본은 이 문을 통해 당시 포화상태였던 일본인 거주지를 조선인 마을까지 확장하고 물자 수송의 편리함도 도모 하였다.
일제강점기 당시의 토목 공법과 재료를 알수있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홍예문 반대쪽에서 본 모습
화강암을 다듬어서 약 10m 높이로 쌓았는데 설계와 감독은 일본이 맡고 조선인과 중국인 노동자들이 공사에 참여하였다. 문 위로는 각국 조계와 기상대로 갈수 있었으며 인천 앞바다와 팔미도 등 여러 섬을 한눈에 내려다 볼수 있었다.

 

 

 

인천향토사연구회, 월미도등대길에서

홍예문 앞길
1920년대 홍예문에서 인천항 방향으로 내려가는 홍예문 앞길의 모습이다.
이 길은 일본 촌에서 홍예문을 지나 당시 축현역에 이르는 간선도로였다. 왼쪽에 있는 2층 벽돌조 건물이 인천 공회당이고 그 앞에 인천경찰서가 보인다. 오른쪽에 우마차가 지나는 곳의 건물이 인천부립병원으로 오늘날의 인성여고 운동장이다.
병원 옆에는 일본인들의 유도와 검도 연마장소였던 무덕관이 자리잡고 있으며 길 아래쪽 옛 다비다모자원 자리에 목조 단층 극장인 인천좌가 있었다. 이 길과 본정통이 만나는 교차로에 식산은행(현재 중화루)가 있었다.

 

 

 

계단에서 본 홍예문
홍예문 위로도 올라갈수 있는 계단이 양쪽에 설치되어 있다.
홍예문은 겨우 차 한대만이 지나갈수 있을만큼 좁아 맞은편에서 기다려 주어야 원활하게 통과할수 있다.

 

 

 

카페 HISTORY
왼쪽 계단길로 올라가면 카페 HISTORY를 지나게 된다. 거리두기 4단계로 12시부터 오후 6시까지만 영업을 한다.

 

 

 

이제 곧 9월이 오는데, 나태주 시인의 <다시 9월>이라는 시가 입구에 적혀있는 아름다운 카페다.

 

 

 

홍예문을 통과한뒤 삼거리에서 좌측 자유공원 방향으로 둘레길이 이어진다.

 

 

 

자유공원

Jayu Park
인천 중구 제물량로232번길


 

자유공원 광장
07:33분 도착.
한국 최초의 서구식 공원으로 고종 25년(1888년) 11월9일 인천항구 각국조계 창정 제1관에 의해 공원으로 획정 되었으며 도면에 미,영,로,청,일 등 각국 외교관이 공동 서명한뒤 한국 최초의 서구식 공원이 만들어졌다.
1883년 개항후 인천으로 몰려든 서양 사람들이 한데 모여 살던 각국 조계 안에 공원이 위치해 있어서 각국공원 또는 만국공원이라고 불렀다. 1914년 각국 조계제도의 철폐와 함께 일본인들이 서공원으로 호칭했었다.

 

 

 

당시 자유공원은 세창양행 사택과 제물포구락부, 존스턴 별장 등이 위치한 인천의 랜드마크였다.
세창양행 사택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주택으로 제1차 세계대전후 독일이 패망하면서 일본에 몰수되어 청광각으로 사용되었고, 건물은 1950년 6.25 한국전쟁때 폭격으로 소실되었다.

 

 

 

맥아더장군 동상
Statue of General McArthur
1950년 9월15일 인천상륙작전으로 수복할 당시, 맥아더 장군이 지휘하여 가장 먼저 상륙을 단행한 사적지임을 기념하여 1957년 개천절을 기해 맥아더 동상을 세우고 자유공원이라 개칭하였다.

 

 

 

인천향토사연구회, 월미도등대길에서

인천항에서 본 각국공원
인천항에서 바라본 각국공원과 각국조계의 모습으로, 당시 외국과의 통상과 조약 체결, 교역 등이 이루어진 제물포 지역 해안가이다.
중심 지역이었던 구릉 위에 영국영사관이 위치해 있고, 아래 우측으로 해안가의 인천세관과 창고 등의 여러 건물들이 있다. 우측에 밀집된 주거지에는 대불호텔, 제물포구락부, 오례당 등이 있으며, 멀리 응봉산에는 인천각, 세창양행 사택 등이 위치해 있다.

 

 

 

공원을 한바퀴 돌아본 후 카페를 지나 우측길로 다시 둘레길을 걷시 시작한다.

 

 

 

현재 자유공원에는 제2회 백범김구 서예대전 수상작들이 전시되어 있다.

 

 

 

제2회 백범김구 서예대전

대상과 최우수상 작품

 

 

 

멋진 캘리그라피 작품들도 눈에 띈다.

 

 

 

화장실을 지나 인천기상대 삼거리 기상대슈퍼에서 좌측으로 돌아 가는 길이다.
이 길은 송월동 동화마을과 차이나타운으로 이어진다.

 

 

 

동방의 횃불
한국 최초 선교를 기념하는 공원에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의 흉상을 좌우에, 중앙에는 성령의 불길을 상징하는 조형물을 세웠다.

 

호레이스 그랜트 언더우드

(Horace Grant Underwood, 1859.7.19 ~ 1916.10.12)

헨리 게어하트 아펜젤러

(Henry Gerhard Appenzeller, 1858.2.6 ~ 1902.6.11)

 

 

 

07:55분,
왼쪽 숲에 얼룩말이 보이는 삼거리에서 오른쪽 동화마을길로 내려간다.

 

 

 

송월동 동화마을

Fairy Tale Village in Songwol-dong
인천 중구 송월동3가


 

우물 옆 그집
이전에 포스팅했던 게시물에 동화마을 사진들이 많아 이번에는 내려가는 길에서 보이는 곳만 담으며 통과하기로 했다.
처음엔 일반 가정집인줄 알았는데, 카페였다.

 

 

 

한쪽 귀퉁이에 우물이 조성되어 있는 예쁜 집이다.

 

 

 

무지개 계단
큰 도로에서 골목으로 들어가는 이 길도 오늘 처음 본다.
동화마을 곳곳을 빠짐없이 둘러보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해 보인다.

 

 

 

블랙래빗 카페
동화마을 입구로 들어서면 가장 눈에 띄는 카페인데, 현재는 폐업을 했는지 몇일째 문을 열지 않는다며 의자에 앉아계시던 아주머니께서 일러 주신다.

 

 

 

차이나타운

Chinatown Street
인천 중구 차이나타운로59번길 12


 

차이나타운길
08:03분, 동화마을 입구에서 좌측으로 차이나타운길이 연결되어 있다.
차이타타운의 여러 입구중 하나, 여기 가로등에 걸려있는 둘레길 로고를 누군가가 돌려 놓았는지 가로 방향으로 엉뚱하게 길을 알려주고 있었다.

 

 

 

이른 아침이라 차들도 거의 없고, 이렇게 사람 없는 차이나타운은 처음 본다.

 

 

 

의선당
1883년 청나라 영사관이 인천 선린동에 설립됨에 따라 선린과 북성 두 동은 화교들이 끊임없이 증가하면서 점차 차이나타운(청관) 거리가 되었다. 그해 인천에 체류하던 화교들은 후에 고향의 전통문화를 계승하여 작은 묘당을 건립하였고, 의를 지키고 착하게 살자는 의미를 지닌 의선당이라 불렀다.
입구 벽면에 있는 벽화는 팔선도라고 한다.
* 팔선도는 종리권, 장과로, 한상자, 조국구, 여동빈, 철괴이, 남채화, 하선고 등 8인의 신선을 묘사한 그림이다.
팔선은 곧 군선 또는 모든 신선을 상징하는 의미를 내포하며 가난, 부귀, 귀족, 평민, 늙음, 젊음, 남성, 여성 등 삶의 모습을 다양하게 상징하는 의미를 지니기도 한다.

 

 

 

의선당 경내
경내에는 7층석탑이 세워져 있고, 사찰 내부에는 부처, 관음보살, 관음장 등의 상이 조성되어 있다.

 

 

 

층층1길
이 계단을 올라가면 2패루인 선린문이 있고 선린문을 통과하면 자유공원으로 길이 이어져 있다.

 

 

 

연경, 청관, 공화춘은 차이나타운의 대표 건물들이라 할수 있다. 휘어지는 도로에 삼각으로 조성되어 그 흐름이 멋스럽다.

 

 

 

공화춘
일제강점기 이래 70여년간 그 명성을 이어온 공화춘은 현재 이 자리가 아니라 짜장면박물관이 있는 자리이다. 그때 당시에 사용했던 공화춘 간판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으며, 같은 형태의 간판이 입구에 걸려 있다.
둘레길은 이곳 삼거리에서 직진방향으로 가면 된다.

 

 

 

정면에 보이는 카페에서 왼쪽에 다음 지점인 해안성당이 있다.

 

 

 

해안성당

Haean Catholic Church
인천광역시 중구 선린동 26


 

제물진두 순교성지, 해안성당
1960년 당시 이곳 차이나타운에는 4,000여명의 중국 화교가 거주하고 있었고, 소수의 화교 가톨릭 신자들은 답동성당을 다니며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중국 화교 신자들의 언어 소통과 민족이질감으로 화교들을 위한 성당이 절실하게 요구되었다.
이에 미국 메리놀회에서 1960년 7월17일 화교를 위한 선린성당을 설립하고, 중국 만주에서 사목 경험이 있고, 중국어에 능통한 고요셉 신부를 초대 신부로 임명하게 된다.
현 성당 건물은 초대 신부의 노력으로 1966년 6월9일에 완공된 건물이다.

 

 

 

설립 초기에는 중국 화교를 위한 성당이었으나, 초대 고요셉 신부가 노환으로 귀국하고 중국 화교 신자가 감소하게 되자 1972년 10월1일 해안성당으로 명칭을 바꾸고 후에 한국인 성당이 되었다.
현재 해안성당은 이 지역에서 치명 당하신 10분의 순교자를 기리는 제물진두 순교 성지를 관할하고 있다.
* 제물진두 순교 성지
이승훈 베드로의 후손들과 박순집 베드로의 외가집안이 치명한 순교터로서 신앙을 위해 목숨을 내놓은 10명의 순교자들을 기리는 곳이다.

 

 

 

인천향토사연구회, 월미도등대길에서

선린동 청관길
1920년대의 선린동 청관길 모습이다. 사진의 좌측은 해안동 천주교회 교육관이고, 우측은 해안동 천주교회이다.
일본식 목조 주택과는 달리 벽돌을 사용하는 조적조 2층 건물이 대부분이고 지붕 위에는 굴뚝이 보인다.

 

 

 

한중원
한.중 문화교류 활성화 및 관광객 휴식을 위해 중국 4대 정원 중 졸정원과 유원의 시설양식을 주제로 조성한 쉼터이다.
중국의 전통수목인 대나무, 장미, 모란 등을 식재하여 중국의 정취를 느낄수 있도록 조성하였다.

 

 

 

한중원을 지나 또 다른 차이나타운 입구를 나가면 대불호텔을 만나게 된다.

 

 

 

청.일조계지 경계계단

Border Stairs between Chinese and Japanese Settlements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51호


 

청.일조계지 경계계단
08:24분, 4거리에서 직진방향이 둘레길 코스지만 좌측길로 올라가면 만나게 되는 청.일 조계지 계단을 안보고 갈수는 없다.
이 지역은 1883년 일본 조계를 시작으로 1884년 청국 조계가 설정되는 경계 지역으로, 만국공원 (현 자유공원)으로 연결되어 계단이 형성되어 있다.

 

 

 

자유공원의 서남쪽 가파른 언덕에 자리 잡고있는 이 계단을 중심으로 청국과 일본의 건물들이 확연하게 서로 다른 양식들로 번화하게 들어서 있다.
이 경계계단은 계단 자체의 가치보다 역사성 및 장소적 측면에서 가치가 높다. 계단 끝부분에 공자상이 세워져 있는게 보인다.

 

 

 

일본식 목조주택
개항 초기 인천에 세워진 일본 주택들은 점포가 함께 딸린 목조주택으로 1930년대 이후에는 일본의 문화주택 (일제강점기에 서양주택의 공간구조와 외관을 따라 지어졌던 주택)이 인천 곳곳에 세워졌으며, 현재도 관동, 신흥동 일대에 여러채가 남아있다.

 

 

 

근대역사안내
이 코스로만 다 돌아봐도 근대사의 문화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을수 있을것 같다.

 

 

 

대불호텔

Daebul Hotel
인천 중구 신포로23번길 101 (중앙동1가 18)


 

대불호텔 전시관
대불호텔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호텔이다.
개항과 함께 인천에는 구미 각국의 외교 사절, 선교사 여행객들이 입항하게 된다. 이들은 대개 목적지가 서울이었기 때문에 곧장 출발을 강행하는데, 철도가 놓이기 전이어서 교통편은 조랑말이나 가마였고 아니면 걷는것 뿐이었다.
그러다 보니 인천에서 하루를 묵지 않으면 안되는 경우가 생겼고, 특히 외국인을 상대로 하는 호텔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대불호텔이 이곳에 세워진 것은 1888년이었다. 이 호텔은 1902년 서울 중구 정동에 세워진 손탁호텔보다도 몇년 앞서는 한국 최초의 호텔로 기록된다.

 

 

 

일본식 2층 목조건물에 문을 연 이 호텔은 영업이 호황을 누리자 지상 3층의 벽돌건물을 새로 건립하였다.
영어로 손님을 맞고 서양음식을 제공하였으며, 처음으로 커피를 팔았으리라고 추정된다. 1918년 중국인이 매입하여 중화루라는 식당으로 개업한 후 1978년 6월 철거될 때까지 정통 북경요리 식당으로 명성을 떨쳤다.
현재는 대불호텔 전시관이 들어서 있다.

생활사 전시관
1960년대부터 70년대 생활 모습이 전시되어 있다. 연탄과 그 당시 평범한 가정집, 서민들의 삶을 표현하였으며, 지금은 거의 찾아볼수 없는 쌀통, 다이얼전화기, 아날로그TV 등도 볼수 있다.
대불호텔 전시관으로 입장하면 된다.
* 관람시간 : 09:00 ~ 18:00
* 정기휴관 : 매주 월요일 (공휴일이 월요일인 경우 다음날 휴관)
* 관람요금 : 성인 1,000원 (5개관 통합관람 성인 3,400원)
* 5개관 통합관람 : 인천개항장 근대건축전시관, 개항박물관, 짜장면박물관, 대불호텔전시관, 한중문화관

 

 

 

인천일본제1은행지점

Japanese 1st Bank (Incheon Branch)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7호


 

인천개항박물관
1883년 인천 개항후 고종 20년 일본의 제1국립은행 부산지점의 인천출장소로 개설된 근대적 금융기관이다. 이들은 산업자본과 고리대자본을 육성하고 토지매입자본을 공급하여 일본의 경제적 침략을 도와주었다.
특히 제1은행은 한국쌀과 산금을 일본에 반입하는데 주력하며 해관 통관세를 취급하는 등 본래의 업무를 넘어서는 일도 관여하였다.

 

 

 

1911년 조선은행 인천지점, 1950년 한국은행 인천지점으로 사용되었고, 8.15 광복후 1980년까지 조달청 인천사무소, 법원 등기소 등으로 활용되다가 2010년부터는 개항기 인천과 근대 문화를 보여주는 인천개항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1899년 신축된 지상 1층 건물로 석재 기단부와 수평 줄눈의 안정되고 견고한 외관을 지니고 있다.

 

 

 

최초의 우편배달부
우리나라의 우편 제도는 1884년 11월18일 서울과 인천 간에 우편물이 교환되기 시작하면서 그 막이 올랐다.
이 조형물은 근대 사진자료에 남아있는 우체부와 우체통(1912년식)의 모습에 기초하여 제작되었다.

 

 

 

인천일본제18은행지점

Japanese 18th Bank (Incheon Branch)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50호


 

인천개항장 근대건축전시관
인천 제18은행 지점은 제18은행이 1890년 해외에 세운 최초의 은행지점으로 한국의 금융계를 지배하려는 목적으로 세워졌다. 일본이 중국을 상대로 한 면직물 중개 무역이 번창하자 수출입과 통관 업무의 중심지였던 인천에 지점을 개설한 것이다.
이후 1936년 조선식산은행 인천지점에 그 업무를 인계하였으며, 1954년 한국흥업은행 지점으로도 사용되었고, 1992년에는 카페로 사용되기도 했다. 2006년 리모델링을 거쳐 현재까지 인천개항장 근대건축전시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1903년에 신축된 단층 건물로 기단부와 기둥은 돌을 사용했으나 벽체는 벽돌을 쌓은 후에 시멘트를 모래 반죽으로 마감하여 석조건물처럼 보이게 한 절충주의 양식 건물이다.
정면 출입구의 상부와 좌우 기둥은 정교하게 석재로 장식하였다.
바로 옆에 구인천일본제58은행지점이 있다.

 

 

 

인천일본제58은행지점

Japanese 58th Bank (Incheon Branch)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9호


 

인천일본제58은행지점
일본 오사카에 본점을 둔 일본 제58은행은 인천 전환국에서 주조되는 신화폐와 구화폐의 교환을 목적으로 1892년 인천에 지점을 설치하였다. 이어 1893년 부산, 1895년 서울에 지점을 설치하였고, 양국에서 송금한 상품 대금의 결재와 무역 금융에도 주력하였다.
후에 야스다은행으로 개편되었으며, 광복후 조흥은행 인천지점, 대한적십자 경기도지사 사옥으로 사용되었다가 현재는 인천시 요식업조합이 사용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프랑스풍 벽돌조 2층 건축물로 1층은 석조 기단으로 되어있고, 2층은 발코니와 아랫방을 밝게 하기 위하여 설치한 돌출창으로 되었는 것이 특징이다.
내부 일부는 개보수로 변경되었으나 오르내림식창 창문을 비롯하여 벽체와 기둥은 아직까지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08:38분,
일본제58은행인천지점을 지나 골목 사거리에서 좌측으로 둘레길이 이어진다. 바닥에 둘레길 표식이 그려져있고, 이정표 앞 cctv기둥에 둘레길 로고가 걸려있다.
이 사거리는 1884년에 개업한 세창양행과 1947년 설치된 인천여자경찰서의 옛터였다는걸 알수 있다.

 

 

 

세창양행터
The Company of Sechang Corporation Site

물감, 금계랍, 바늘로 유명했던 세창양행터에 안내되어 있는 세창양행 직원들의 모습이다.
개항과 함께 서구의 무역상들이 제일 먼저 인천에 도착했다. 독일의 세창양행은 1884년 이곳 중앙동3가에 단층 양옥을 짓고 개업하였다. 세창양행은 함부르크에 본사를 두고 상하이와 고베에도 지점을 연 대무역상이었다. 세창양행은 사장의 이름을 따 마이어상회라고도 불렸다.
조선의 외교 통상업무를 장악하고 있던 독일인 묄렌도르프의 후원 아래 물감, 화약, 금계랍 (염산 키니네, 맛이 쓰고 물과 알코올에 녹음, 해열진통제로 쓰인다) 등의 화학제품과 면도칼, 바늘 등의 정밀한 강철 제품의 수입판매는 물론 광산업, 해운업, 은행보험 대리점업 등으로 사업 영역을 넓혔다.
한국 최초로 신문 광고를 낼 만큼 상술이 뛰어나고 질도 좋아서 생활용품으로 인기가 높았는데, 독일이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하자 일본에 의해 모든 재산이 묶이는 불행을 겪기도 했다.
광복 후 다시 재기하려고 했으나 6.25전쟁으로 무산되었다.

 

 

 

옛 인천여자경찰서 터
이곳은 인천여자경찰서가 있던 곳이다.
1946년 미군정은 여성, 아동 등 사회적 약자 보호를 위해 '여자경찰제도'를 도입하기로 하였고, 1947년 5월에 부산, 대구, 인천에 여자경찰관들로만 구성된 여자경찰서가 설치되었다. 인천여자경찰서는 처음 선화동에 세워졌으나, 6.25전쟁 이후 이곳 중앙동으로 옮겼다.
주요 업무는 성매매 단속, 청소년 지도 보호, 여성 계몽, 범죄정보 수집 등이었다.
당시 남자 경찰관이 여성의 신체를 수색하는 것을 금지하고 여성은 반드시 여자경찰서에 수용하도록 한 점이나, 여성 사건에는 반드시 여자 경찰관이 참여하도록 한 점 등은 오늘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매우 선진적인 제도였다.
여러 방면에서 맹활약하였지만 일반 경찰서와 업무 경계가 명확하지 않고, 급속한 인구 팽창과 도시화로 치안환경이 변화하면서 1957년 폐지되었다. 이후 여자 경찰관들은 각 경찰서에 배치되었다.

 

전창신 경감 (1901 ~ 1985)
인천여자경찰서 2대 서장인 전창신 경감은 1919년 3월 함흥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주도한 혐의로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8개월간 옥살이를 한 독립운동가로, 광복 후 1946년 조국치안의 선봉에 서기 위해 경찰이 되었다.
1950년 11월 인천여자경찰서장으로 부임하여 1951년 10월 퇴임할때까지 여성피해자 및 피난민 등 약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힘썼으며, 특히 경찰애육원을 설치하고 전쟁고아와 홀로 아이를 키우는 여성 보호에 주력하였다.

 

 

 

각국조계지계단

A Foreign Concession Stairs
인천 중구 송학동1가


 

각국조계지계단
근대 개항기 인천에 정착하려는 외국인들을 위해 인천항 주변에는 조계지가 들어섰고, 응봉산 정상에는 각국공원(현, 자유공원)이 조성되어 많은 사람들이 찾는 명소로 자리 잡았다. 공원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편리하게 언덕을 오르내릴수 있도록 응봉산 곳곳에 여러개의 계단이 만들어졌다.
당시에 세워진 양관들은 하나둘 역사속으로 사라졌으나 석축과 담장 등이 남아 과거의 모습을 전하고 있다.
계단의 장식적인 요소는 찾을수 없으나 보행로에 석조계단을 설치하는 것이 흔하지 않던 당시의 사정을 감안하면 각국조계지 계단의 중요성과 가치를 짐작할수 있다.

 

 

 

각국조계지계단과 오례당 저택
계단 주위에는 여러나라 양식의 주택이 들어서 독특한 경관이 만들어졌다.
청일조계지 경계계단 주위에는 청국인과 일본인들이 세운 작은 크기의 주택이 들어섰고, 각국조계지 계단 주위에는 당시 인천세관에 근무하던 서양인들이 웅장한 서양주택을 지었다. 가장 유명했던 양관은 이 계단에서 바로 출입하던 오례당 저택(현, 동국빌리지터)이다.
오례당 저택은 인천해관 출신인 사업가 오례당이 1909년 큰돈을 들여 지은 초호화 주택으로 포르투갈 태생인 부인의 청에 따른 것이었다. 빨간 벽돌로 쌓은 외벽, 아름다운 유리창 등 건축미가 뛰어났으나 1960년대 이곳에 주둔했던 군부대의 실화로 소실되었다.

 

 

 

각국조계지계단 중간 부분에 위치한 인천제일교회를 지나 계단을 끝까지 올라온 후 좌측 인천역사자료관 방향으로 가면 된다.

 

 

 

인천시민愛집

인천광역시 등록문화재 제1호
인천시 중구 신포로 39번길 74


 

담장에 청사초롱이 길게 매달려 있는 이 건물은 인천역사자료관으로 현재 인천시민애집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2021년 7월1일부터 인천시민애집을 개방한다는 안내를 보고는 잠시 들어가 보기로 했다.

 

 

 

인천시민愛집
08:50분 도착해 아직 개방시간이 10분 남았지만 직원분께 말씀드렸더니 허락해 주셔서 몇장 찍고 나왔다.
재단장 전,후의 비교사진이 걸개로 안내되어 있다. 역사북쉼터, 역사회랑, 기획전시실, 디지털갤러리, 제물포정원, 조망데크까지 전체적으로 많이 바뀐 모습이다.
운영시간 : 09:00 ~ 18:00, 월요일 휴관
주차 : 자유공원 공영주차장 (송학동1가, 자유공원의 여러 주차장중 제일 가까움, 주차비 무료)

 

 

 

일제강점기에 일본인 사업가의 저택으로 지어졌으며 광복 후에는 동양장이라는 서구식 레스토랑과 송학장이라는 사교클럽으로 사용되었다. 이후 인천시에서 사들여 1966년 한옥으로 개축한 뒤 인천시장 공관으로 사용되었다.
2001년 10월에 역사자료관으로 새롭게 단장한뒤 현재는 인천시민애집으로 재단장을 마치고 2021년 7월에 일반 관람객에 개방한 것이다.

 

 

 

2021년 8월8일에 인천시는 4건의 등록문화재를 결정했는데, 옛 시장관사였던 인천시민愛집이 제1호로 등록되었다고 한다. 제2호는 잠시후에 보게 될 자유공원 플라타너스가 등록되었다.
인천시민愛집 앞으로는 울창한 나무들로 정원이 조성되어 있어 산책하기에 좋은 곳이다.

 

 

 

각국조계석
인천시민愛집 입구 맞은편에 위치해 있다.
조계란 영토의 일정한 범위를 한정하여 외국인의 거주를 허가한 지역으로 거류지라고도 부른다.
인천에는 1883년 일본전관조계를 시작으로 같은 해 12월 청국전관조계, 1884년 10월에 각국공동조계가 설치되었다.
이 각국조계석에는 '各國地界(각국지계)'와 '朝鮮地界(조선지계)'라는 명문이 있어 인천의 각국조계와 조선인 마을이 맞닿는 개항장의 외곽 지점 어딘가에 서 있던 것임을 알수 있다.
2007년 제물포구락부 보수 공사중에 발견되어 현재 인천시립박물관이 보관하고 있다.

 

 

 

제물포구락부

Former Jemulpo Club Building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7호


 

인천시민愛집을 지나 바로 앞에 제물포구락부가 위치해 있다. 출입할수 있는 문은 이쪽이 아니라 옆 계단을 올라가면 된다.

 

 

 

제물포구락부
인천은 우리나라 최초의 국제도시였다. 다른 개항장과 달리 서양 각국의 외교력과 경제활동이 청.일을 압도적으로 견제하면서 자주적 개항장으로써의 가능성과 희망을 품게 해준 도시였다.
1901년 6월 응봉산 자락에 건축된 제물포구락부는 그 구심점 역할을 담당한 상징적 공간이었다.

 

 

 

일제 강점기와 6.25전쟁 그리고 인천상륙작전 등 지난한 근현대사를 시민과 함께 해왔던 곳이다.
건축 당시의 외형이 그대로 보존되고 있는, 동북아시아와 러시아의 건축 양식이 결합된 독특한 근대문화유산으로 평가받고 있다. 1953년 4월부터 1990년 5월까지는 시립박물관으로 활용되었다.

 

 

 

드라마 도깨비 촬영지
제물포구락부는 드라마 <도깨비>의 촬영지로도 유명하다. 13화차에 극 중 도깨비를 모시는 가신 집안이자 덕화의 할아버지인 유회장의 집 앞으로 설정하여 이곳에서 촬영되었다.

 

 

 

제물포구락부를 본후 계단으로 올라가면 자유공원 맥아더동상 부근으로 올라가게 된다. 둘레길은 다시 계단을 내려와 가던 방향으로 직진하면 된다.
우측에 보이는 큰 나무는 플라타너스라고 한다.

 

 

 

자유공원 플라타너스

Platanus Tree in Jayu Park
인천광역시 등록문화재 제2호


 

보호수 플라타너스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플라타너스 나무로서 개항기 공원역사를 증언하는 역사적, 문화적 가치가 있는 나무다.

 

 

 

개항기인 1884년에 식재되어 높이 30.5m, 올해로 수령이 137년이 되었다.
개항기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채 우리나라 최초이자 가장 오래된 이 플라타너스는 인천상륙작전의 포호속에서도 원형을 잃지않고 현재까지 굳건하게 살아 남았다.

 

 

 

2015년 8월에 보호수로 지정된 이후 2021년 8월에 인천 등록문화재 제2호로 등록되었다.
현재는 천연기념물 지정을 추진중이라고 한다.

 

 

 

플라타너스 앞 길로 들어선후 계단을 올라가는 둘레길 코스가 이어진다.

 

 

 

계단 중간에 이렇게 큰 공원길이 나오자 왼쪽으로 진행하여 걷는 중이다.
저 앞 매점이 있는 곳에 자유공원 팔각정이 있다.

 

 

 

연오정과 석정루

Yeonojeong & Seokjeongru Pavilion
인천시 중구 자유공원로 93 (북성동3가)


 

연오정
자유공원 벚꽃길에 있는 연오정은 한의사 조길이 그의 부친인 독립운동가 조훈(1886~1938)의 뜻에 따라 지은 육각정자이다. 봄이면 벚꽃길로 유명하며, 특히 겹벚꽃이 아름다운 곳이다.

 

 

 

석정루
삼화조선을 경영했던 이후선씨가 시민들의 휴식처가 될 누각을 지어 인천시에 기증한 것이다.
2층에 올라가면 인천 앞바다와 월미산 등을 조망할수 있지만 현재는 거리두기 4단계로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

 

 

 

석정루를 나와 가던 길로 계속 진행한다. 자유공원 곳곳에서 제2회 백범김구 서예대전 작품들이 전시되고 있다.

 

 

 

09:11분, 월드커뮤니티센터 앞 삼거리에서 우측으로 둘레길이 이어진다.
대복사 맞은편 담장에 이곳이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지"임을 알리는 비가 세워져 있는게 보인다.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지

United States-Korea Treaty of 1882
인천시 중구 북성동3가 8-3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지
그동안 조약 체결장소로 알려진 중구 인천올림포스호텔과 동구의 화도진공원에 표지석이 세워져 있었지만 실제 체결 장소로 논란이 많았다.
1882년 5월22일 조선이 서구와 최초로 맺은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지가 자유공원 입구인 이곳에서 실제로 체결되었음이 2013년에 밝혀지면서 인천시는 역사적 오류를 바로잡기 위해 여기에 비를 세우게 되었다.


* 조미수호통상조약
전문 14개조로 구성된 조약이 체결되면서 조선의 관세 자주권을 인정하는 근거 규정이 마련되었으나 미국에 초혜국 대우를 부여하고 치외법권을 허용하는 등 조선에 불리한 내용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이로써 조선은 비로소 구미 자본주의 국가에 직접적인 문화개방을 하게 되었다.

 

 

 

공자상

이 계단은 청일조계지 경계계단으로 아래가 내려다 보이는 곳에 공자상이 세워져 있다. 이 공자상은 중국 청도에서 기증한 것이라고 한다.

 

 

 

삼국지 벽화거리

Samgukji Mural Street
인천 중구 선린동


 

삼국지 벽화거리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지에서 내리막길 양쪽 벽면에 그려진 삼국지 벽화들이 볼만한 거리다.

 

 

 

삼국지 소설 속의 유비, 관우, 장비, 제갈공명 등의 무용, 지략을 소개하는 150m 길이의 대형 벽화거리로, 역사적 사실을 고사성어와 그림으로 즐기면서 과거 후한시대로의 시간여행을 즐길수 있다.

 

 

 

삼국지 벽화거리를 내려와 큰길로 나가기 전 골목에 가로길이 나오면 좌측으로 간다. 오늘 꼭 들려봐야 하는 장소가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저 가로길은 처음 차이나타운을 걸었을때 공화춘에서 해안성당으로 직진하던 길이다.

 

 

 

다시 우측길로, 경극이라는 전시물이 있는 골목으로 들어선다.

 

 

 

경극
베이징에서 발전하였다 하여 경극이라고 하며, 서피, 이황 2가지의 곡조를 기초로 하므로 '피황희'라고도 한다. 14세기부터 널리 성행했던 중국 전통가극인 곤곡의 요소가 가미되어 만들어졌다.
경극에 사용되는 다양한 가면들이 전시되어 있다.

 

 

 

인천 선린동 공화춘

Gonghwachun Restaurant in Seollin-dong, Incheon
국가등록문화재 제246호


 

공화춘의 시작
공화춘의 전신은 산동회관으로 중국인 전용 주거지인 청국 조계지에서 음식점과 호텔의 혼합형 숙식업소로 시작하였다.
1911년 산동성 출신의 화교 우희광이 지금의 위치로 이전하여 개업하였다가 이듬해 중화민국의 수립을 기념하여 '공화국의 봄'이라는 의미의 공화춘으로 개명하였다.
일제강점기 이래 인천과 서울의 상류층들이 이용하는 경인지역 최고급 요리점으로 70여년간 그 명성을 이어왔고, 6.25전쟁 이후에는 짜장면 등 대중 음식을 보급하였다.

 

 

 

짜장면 박물관
공화춘은 화강암 석축 위에 벽돌을 쌓아 올린 2층 벽돌조 건물로 화교의 생활 모습을 보여주는 근대 문화유산이다.
연안부두 신축으로 인천역 일대 상가가 쇠락하면서 1983년 영업을 중단하였고, 2012년부터 짜장면박물관으로 활용하고 있다.
입구에 공화춘 간판이 걸려있고, 왼쪽에 특등요리, 오른쪽에 연회석완비라는 뜻의 포판회석 간판이 걸려 있다.

 

 

 

이전에 관람한 사진들이 있어서 이번에는 외관 스케치만 했다.

관람시간 : 09:00 ~ 18:00 (입장마감 17:30)
정기휴관 : 매주 월요일 (공휴일이 월요일인 경우 다음날 휴관)
관람요금 : 성인1,000원, 청소년700원, 어린이 무료
통합관람 : 5개관 통합관람 요금 성인3,400원, 청소년2,300원, 어린이 무료
* 5개관 : 인천개항장 근대건축전시관, 개항박물관, 짜장면박물관, 대불호텔전시관, 한중문화관

 

 

 

짜장면 박물관의 뒷모습
이곳이 입구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정문쪽 보다 넓직한 느낌이 든다.

 

 

 

밴댕이회 거리
마지막 밴댕이회 거리를 지나 인천역으로 가면 된다.
옛날에는 밴댕이거리로 워낙 유명해서 밴댕이집들이 많았었는데, 지금은 많이 사라지고, 거리 자체도 많이 변해 있었다.

 

 

 

패루 중화가
웨이하이시가 기증한 차이나타운의 대표적 상징물로, 옛부터 중국인들이 동네 입구에 세웠던 마을의 대문 같은 것이다. 귀신을 쫓고 상가 번영을 기원하기 위한 화려한 장식과 함께 경축의 의미를 담고 있다.
차이나타운에는 4개의 패루가 있다. 자유공원 방향에 2패루인 선린문, 개항장거리 방향에 3패루인 인화문, 동화마을 방향에 4패루인 한중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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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차이나타운과 송월동 동화마을] 자유공원, 개항장거리 도보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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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역 (종료지점)

Incheon Station
인천시 중구 제물량로 269 (북성동1가 3-1)


 

한국 철도의 탄생역, 인천역
09:29분, 차이나타운 패루에서 횡단보도를 건너 오늘 12코스의 종점 인천역에 도착했다. 바닥에 월미도 코스인 13코스 안내 화살표가 걸음을 재촉하듯 그려져 있다.
경인철도는 1897년 3월 인천 우각현에서 기공식을 거행하고 공사에 착수하여 1899년 9월 개통된 한국 최초의 철도이다.
개통 당시 경인선은 7개 역에 33.2km 구간을 1시간30분에 달렸으며, 소사와 영등포에만 정거하는 급행열차와 용산역을 거치는 완행열차도 있었다.
인천역은 한국전쟁으로 역사가 소실되어 한동안 임시역사를 사용하다가, 1960년 9월17일 현재의 역사가 다시 지어지게 되었다. 작은 사진은 1910년대 인천역전의 풍경이다.

 

 

 

마치며...
인천둘레길 안내에는 거리 5km, 1시간20분 소요된다고 되어 있다.
근대 역사의 수많은 이야기들을 둘러보거나 읽어보지 않고 그냥 길따라 계속 걷기만 했을때를 얘기하는것 같다.
총 6.99km, 3시간11분이 소요됐다.
그나마 이른 아침이라 거리에 사람들이 없어 둘레길 로고 찾기가 수월했기 때문에 헤매지 않고 시간을 많이 줄일수 있었다.

생수 하나로 잠깐의 휴식시간을 보내고, 월미도 13코스를 바로 이어서 걸을 예정이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하고 고맙습니다
오늘도 좋은날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