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 전적지 답사여행] 신미양요의 아픈 역사, 초지진, 덕진진, 광성보, 갑곶돈, 고려궁지

2021. 9. 9. 21:48+ 카메라를 들고 떠나다/문화유산 답사기

[강화 전적지 답사여행]
강화나들길 2코스 호국돈대길 주요 지점 답사

문화유산 답사기
인천 강화

Photographed by BayZer™

2021.09.04

 

 

 

마니산 등산을 마치고 날씨가 너무 좋아 강화까지 온김에 어디라도 들려야 할것 같았다.
"2021년 7월1일부터 전적지 무료화 운영 실시"라는 현수막을 보고 전적지를 차례대로 돌아 강화대교로 넘어가는 코스로 계획을 잡았다.

 

 

오늘의 코스
마니산 - 초지진 - 덕진진 - 광성보 - 갑곶돈 - 고려궁지 - 강화산성 북문

*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갑곶돈부터 초지진까지 이 코스는 강화나들길 2코스 호국돈대길의 주요 지점이었다. 오늘은 자차로 이동하며 들려보기로 한다.

 

 

 

초지진

Chojijin Fort
사적 제225호
인천 강화군 길상면 초지리 624


 

 

 

초지진 입구
초지진은 조선 후기 서해안으로 침입하는 적을 막기 위해 만든 여러 요새 중 하나로, 병자호란 이후 수비 체제가 강화도 중심으로 개편되면서 경기 서남부 해안의 진들이 강화도 일대로 옮겨 왔다.
초지진도 경기도 안산에 있던 수군 기지를 효종 7년(1656년)에 이곳으로 옮겨 설치한 것에서 유래했다.

* 입구에서 QR코드와 체온측정후 입장
* 입장료, 주차비 무료

 

 

 

강화 지역은 1870년대 통상을 요구하며 침략한 열강들과 격렬히 싸웠던 곳이다.
특히 초지진은 고종8년(1871년) 신미양요때 전력의 열세로 미군에게 점령을 당하면서 대부분의 시설물이 파괴되었다.

 

 

 

폐허가 된 초지돈대
1871년 미군은 6월10일 약2시간 동안 먼저 맹렬한 함포사격을 가하여 조선군을 파괴시킨 후에 상륙하였기 때문에 오후 4시경 초지돈대에 전투 없이 입성하였다.

포격으로 인해 폐허가 된 초지돈대의 내부 모습으로 무너져 내린 포좌 입구가 연이어져 있다. 오른쪽에 파괴되어 앙상한 모습을 하고 있는 건물은 간이 화약고로 추정된다.

 

 

 

초지진 내부는 둥그렇게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대부분 허물어지고 성벽의 기초만 남았던 것을 1970년대에 복원하였다. 가운데에 포각이 세워져 있다.

 

 

 

고종12년(1875년) 운요호사건 때에는 상륙을 시도하는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인 곳이다.
운요호사건을 계기로 고종13년(1876년)에 조일수호조규 (강화도조약)이 체결 되었으며,이후 우리나라는 주권 상실의 시련을 겪게 되었다.

 

 

 

포각
포각 내에는 당시에 실제로 사용했던 대포를 전시하고 있다.

 

 

 

초지진 홍이포
포구에서 화약과 포탄을 장전한 다음 뒤쪽 구멍에 점화하여 사격하는 포구장전식 화포다. 사정거리는 700m이며 조선 영조때부터 주조하여 사용하였다.
화약의 폭발하는 힘으로 포탄은 날아가지만 포탄 자체는 폭발하지 않아 위력은 약하다.

 

 

 

초지진에서 바라본 강화해협의 모습.
이곳으로 미군 함대들이 들어와 초지돈대를 향해 함포사격을 했다고 하니,, 터지지도 않는 포탄을 날리는 조선군과는 게임 자체가 안되었을 것이다.

 

 

 

초지대교가 보이는 근거리에 초지진이 위치해 있다.
아픈 역사를 뒤로하고, 강화 앞바다는 너무도 평화로운 모습이다.

 

 

 

하늘의 구름이 너무 좋아 올려다보니 운좋게 장관인 해무리를 보게 됐다.

* 해무리는 대기중 수증기에 햇빛이 굴절되면서 태양 주변으로 둥근 원 모양의 무지개가 생기는 현상이다.

 

 

 

초지진 소나무
초지돈대의 소나무 수령은 약 400년 정도라고 한다. 이 나무들은 효종7년(1656년) 강화유수 홍중보가 초지진을 설치할때 초지돈대에 선비의 기상과 지조를 상징하기 위해 심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 두 소나무에는 1870년대 격전중에 날아온 포탄 파편에 의한 상처의 흔적이 남아 있다.

 

 

 

"조선군은 근대적인 무기를 한 자루도 보유하지 못한채 노후한 전근대적인 무기를 가지고서 근대적인 화기로 무장한 미군에 대항하여 용감히 싸웠다. 조선군은 그들의 진지를 사수하기 위하여 용맹스럽게 싸우다가 모두 전사했다.
아마도 우리는 가족과 국가를 위해 그토록 강력하게 싸우다가 죽은 국민을 다시는 볼수 없을 것이다"

- 신미양요 당시 미군 슐레이 대령의 기록 중

 

 

 

덕진진

Deokjinjin Fort
사적 제226호
인천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 846


 

 

 

공조루
덕진진은 조선시대 강화 해협을 지키는 요충지로 원래는 수영(조선시대 수군절도사가 있던 군영)에 속한 진이었다.
공조루 앞쪽에 넓은 주차장이 있다.

* 입구에서 QR코드와 체온측정후 입장
* 입장료, 주차비 무료

 

 

 

19세기 후반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등 외세에 맞서 싸운 장소로, 신미양요때 초지진에 상륙한 미국 해병대에 의하여 점령을 당한 슬픈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때 덕진진은 모두 파괴되어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만 남아 있었으나 1977년 돈대와 성곽을 보수하고 덕진진의 성문인 공조루를 복원했다.

 

 

 

복원된 덕진진 성곽에 여러 종류의 깃발이 펄럭이고 있다.

 

 

 

남장포대
조선 숙종5년(1679년)에 설치한 덕진돈, 남장포대 등이 모두 덕진진에 소속되어 있었다. 남장포대는 강화의 8개 포대중 하나다.

 

 

 

대포 10문이 설치되어 있으며, 고종8년(1871년) 신미양요때 미국 아세아함대와 맹렬한 포격전을 전개하였던 곳이다.

 

 

 

성벽과 시설물은 이때 모두 파괴되었는데 1977년에 다시 복원하였다.

 

 

 

덕진돈대
덕진진에 소속된 2개 돈대중 하나로, 북쪽의 광성보와 남쪽의 초지진 중간에 위치하여 강화수로의 가장 중요한 요새지이기도 하다.

 

 

 

신미양요 당시 미국 함대와 48시간 동안 치열한 포격전을 전개했지만 전력 약세로 이때 모두 파괴되고 말았다.

 

 

 

초지돈대에서 바라본 덕진돈대의 모습

 

 

 

1871년 덕진돈대를 강제 점령한 미국 해병대들이 주변 지형을 살펴보고 있다.

 

 

 

덕진진 앞쪽 해안가에 경비를 서고 있는 해군장교 1명과 수병5명.
염하강 건너편으로 김포의 덕포진 일대와 손돌의 묘가 있는 언덕이 바라보인다.

 

 

 

덕진돈대를 우측 옆으로 돌아가면 경고비가 있다.
알고보니 이 길은 "강화나들길 2코스 호국돈대길"이었다.

 

 

 

1977년에 다시 복원된 덕진돈대의 성벽
유구한 세월의 시간들이 성벽에 고스란히 묻어 나온다. 이 길로 가면 경고비가 있다.

 

 

 

경고비

향토유적 제9호

조선 고종4년(1867년) 흥선대원군의 명으로 강화 덕진첨사기 건립한 것으로 개화기에 외국선박의 출입을 통제하겠다는 척화의 의지를 담고 있다.

 

 

 

강화 앞바다를 향해 서있는 경고비의 정면에는 "海門防守他國船愼勿過 (해문방수타국선신물과)" 라고 각인되어 있다.

 

 

 

광성보

Gwangseongbo Fort
사적 제227호
인천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 833


 

 

 

안해루
광성보는 병자호란으로 강화도가 처참하게 함락된 후 체계적으로 방어하기 위하여 강화로 천도한 후에 돌과 흙을 섞어 해협을 따라 길게 쌓은 성이다.
조선 광해군때 헐어진 곳을 다시 고쳐 쌓았으며, 조선 효종9년(1658년)에 강화유수 서원이 광성보를 설치하였다.

* 입구에서 QR코드와 체온측정후 입장
* 입장료, 주차비 무료

 

 

 

안해루 성문
광성보는 신미양요 기간 동안 조선군과 미군이 가장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곳이다.

 

 

 

성문안에서 올려다본 용

 

 

 

강화 해협 주위에 설치한 12개의 진과 보 중의 하나인 광성보는 화도돈대, 오두돈대, 광성돈대를 관할하였다.

 

 

 

광성돈대는 안해루 좌측에 위치해 있고, 화도돈대와 오두돈대는 광성보에서 4km거리에 위치해 있다.

 

 

 

광성돈대
광성보에 소속된 3개의 돈대중 하나로, 숙종5년(1679년) 함경도, 황해도, 강원도의 승군 8,000명과 어영군 4,300명이 40일만에 완공하였다고 한다. 포좌 4개소와 포 3문이 복원 설치되었다.

 

 

 

대포는 초지진의 것처럼 포알 자체는 폭발하지 않아 위력이 약한 홍이포로 병자호란에도 사용하였다고 전한다.

 

 

 

소포는 사정거리 300m로 포알은 대포와 같다. 대포는 조준이 안되나 소포는 조준이 된다.
작은것은 불랑기라 하며 프랑스군이 쓰던 것이라 한다.

 

 

 

신미양요순국무명용사비와 쌍충비각
무명용사비는 신미양요때 미군이 10여명의 사상자를 냈던것에 비해 조선군 지휘관 어재연 장군과 군졸이 열세한 무기로 용감하게 싸우다 순국한 것을 가리기 위해 세워진 비다.

 

 

 

쌍충비각
신미양요때 광성보 전투에서 순절한 어재연 장군과 아우 어재순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로, 어재연, 어재순 이하 전 수비군은 미국 아세아함대의 해병대와 치열한 격전을 벌려 전 수비군이 장렬히 순국한 곳에 충절을 기리기 위해 내부에 쌍충비가 세워져 있다.

 

 

 

쌍충비
중군 어재연 외 59명의 순절비로, 1기는 광성파수순절비, 다른 1기는 어재연과 어재순 순절비인데 모두 1873년에 건립한 것이다.
고종때부터 제사를 지내 왔으며, 1970년부터는 어재연의 후손들이 제사를 올려 충절의 유업을 추모하고 있다.

 

鎭撫中軍魚公在淵殉節碑
진무중군 어재연 순절비
늠름한 충성과 용맹은 해와 달처럼 빛나고, 형제가 서로 뒤따라서 죽음보기를 돌어가는 것같이 했네

幼學魚在淳
유학 어재순
형은 나라를 위해 죽고, 아우는 형을 위해 죽으니 한 가문의 충성과 우애 백세토록 풍교의 울림이네

 

 

 

신미 순의총
신미양요때 전사한 용사들의 묘가 있는 곳이다.
광성보 전투에서 조선군은 최후의 한명까지도 포로가 되기를 거부하며 비겁하게 물러서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중군 어재연 장군과 아우 재순을 비롯한 군관, 사졸 53인의 전사자 중, 어재연 형제는 고향인 충북 음성군 대소면 성본리에 안장하고, 남은 군졸 51인은 신원을 분별할수 없어 7기의 분묘에 나누어 합장하여 그 순절을 기리고 있다.

 

 

 

손돌목돈대
일명 손석항돈대라고도 하며, 용두돈대에 못미쳐 구릉 정상부에 둥그렇게 쌓은 돈대이다.

 

 

 

강화 일대가 훤히 내려다 보여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짐직할 수 있다.

 

 

 

점령당한 후 손돌목돈대의 조선군 시체들 (1871.6.11)
조선군 사령관인 중군 어재연 장군이 직접 지휘하며 격렬하게 반격을 가했으나, 미군 측에서는 맥키(Hugh Mckee) 해군 중위와 두명의 수병이 전사한 반면, 조선측에서는 어재연 장군을 비롯한 대부분의 조선군이 전사한 곳이다.
흰옷 차림의 조선군 전사자 시체들이 즐비하게 널려있는 모습이 처참하기 그지 없다.

 

 

 

어재연 장군의 수자기
신미양요 때 어재연 장군이 사용한 장군기로, 가로 세로 각각 4.5m정도의 광목 재질로 만든 수자기이다.
깃발에 새겨진 '帥(수)'는 장수, 장군을 상징하는 뜻이다. 신미양요때 미군에 의해 전리품으로 강탈 되었다.
영구 반환을 추진했으나 불가했고, 우선 장기 대여 형식으로 현재는 강화전쟁박물관에 전시, 보관되어 있다. 현재 박물관에 전시중인 것은 복제본이며, 2020년 반환 예정이었으나 계약기간 연장 및 갱신으로 2021년 현재에도 계속 국내에 남아 있다.

* 콜로라도 함상의 수자기 사진

수자기를 최초로 끌어내린 왼쪽의 퍼비스 일병과 그를 도운 오른쪽의 브라운 상병이 총을 짚고 서 있다.

 

 

 

조선 숙종5년(1679년)에 축조된 손돌목돈대

 

 

 

포좌 3개가 강화 해협을 향해 열려 있는 모습이다. 원래 돈대 중앙에 3칸의 무기고가 있었지만 현재는 아무 시설도 없는 상태다.

 

 

 

손돌목돈대에서 바라본 강화해협의 모습

 

 

 

광성포대로 가는 길에 바라본 손돌목돈대

 

 

 

광성포대 가는길

 

 

 

광성포대
국방 강화책으로 숙종은 강화도 내에 내성, 외성, 12진보, 54돈대 등을 축조하여 요새화를 이루었으나,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거치면서 화력을 증가시키는 일이 시급한 과제로 떠올랐다. 이에 따라 고종11년(1874년)에 용진진, 광성진, 덕진진, 초지진에 포대를 설치하였다.
광성포대는 손돌목돈대 주변 3곳에 설치되었으며, 각각 9좌, 4좌, 3좌의 포좌를 갖추고 있다.

 

 

 

용두돈대
강화해협을 따라 용머리처럼 돌출한 자연 암반위에 설치된 천연 요새로 손돌목돈대에 속해 있는 외곽 초소겸 포대이다.

 

 

 

용두돈대 가는 길

 

 

 

고종8년(1871년) 포대가 설치되면서 정비된 곳으로 1977년 강화 전적지 정화보수사업을 하면서 용두돈대라고 부르게 되었다.

 

 

 

병인양요, 신미양요 때 파괴된 성벽을 1977년에 복원하였다.

 

 

 

강화 전적지 정화기념비
용두돈대 내에 설치된 기념비로 앞면에는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의 글씨, 뒷면에는 이은상 선생이 짓고 김충현 선생이 쓴 비문이 새겨져 있다.

 

 

 

용두돈대에서 바라본 강화해협
용두돈대를 휘돌아 나가는 구간으로 물살이 센 곳이다.

 

 

 

갑곶돈

Gapgotdon
사적 제306호
인천 강화군 강화읍 해안동로 1366번길18 (갑곳리 1020)


 

 

 

갑곶돈, 강화전쟁박물관 입구
숙종5년(1679년) 5월에 완성된 48돈대 가운데 하나로 이곳은 예로부터 외부에서 강화도로 들어오는 길목이었다.
망해돈대, 제승돈대, 염주돈대와 함께 제물진의 관할 하에 있었다.

* 입구에서 QR코드와 체온측정후 입장
* 입장료, 주차비 무료

 

 

 

세계금속활자발상중흥기념비
입구에 들어서면 안내소 옆에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개발한 고려인의 우수성과 과학성을 널리 알리기 위해 마련된 기념비가 있다.
고려는 금속활자를 세계에서 처음 발명하였다. 이것이 중국, 아라비아, 독일까지 퍼져 나갔으며, 이곳 강화는 13세기 금속활자 인쇄술을 중흥 발전시킨 고장이다.

 

 

 

강화 비석군
이 비석군은 조선시대 선정을 베푼 유수, 판관, 경력, 군수 등의 영세 불망비 및 선정비이며, 자연보호의 일환으로 세운 금표, 삼충신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삼충사적비 등 총 67기가 있다.
자연보호의 일환인 금표는 숙종29년(1703년) 강화유수부(고려궁지) 앞 등지에 세웠던 것이다.

* 금표에는 "가축을 놓아 기르는 자는 곤장 100대, 재나 쓰레기를 버리는 자는 곤장 80대를 친다" 라는 경고문이 적혀있다.

 

 

 

갑곶리 탱자나무

천연기념물 제78호

강화에 탱자나무를 심게 된 이유는 성벽 밑에 심어 억센 가시를 이용하여 철조망과 같은 역할을 하기 때문에 적병의 접근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병자호란때 심었던 것이라고 한다.

 

 

 

이 탱자나무가 귀중한 이유는 강화도가 우리나라 서해안에서 탱자나무가 자랄 수 있는 북쪽 한계선이 됨을 입증하는 자료이기 때문이다.
사기리에 있는 강화 사기리 탱자나무(제79호)와 함께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현재 수령은 약400년으로 추정되며, 나무의 크기는 높이 4m, 지상부의 줄기 둘레 1m이다.
탱자나무의 열매는 둥글고 노란색이며 9월에 익는데, 향기가 좋으나 먹지는 못한다.

 

 

 

포각
포각 안에 당시에 사용했던 진품 대포를 진열하였다.

 

 

 

대포
구경 100mm, 길이 215cm, 중량 1,800kg이다. 사정거리는 700m지만 초지진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포탄 자체가 폭발하지 않아 위력은 약하다.

 

 

 

이섭정
태조7년(1398년) 강화부사 이성이 세웠으나 무너진지 오래 되었다가 1976년 강화 국방유적 복원 정화사업의 일환으로 갑곶돈 안에 팔각의 2층 정자를 세워 이섭정이라 현판하였다.

 

 

 

고종3년(1866년) 9월 병인양요 때 프랑스의 극동함대가 600여명의 병력을 이끌고 이곳으로 상륙한뒤 강화성과 문수산성을 점령하였다.

 

 

 

1977년에 다시 복원된 것으로 돈대 안의 대포는 조선시대의 것으로 진품이라고 한다.
왼쪽 작은것은 불랑기로 탄환과 화약을 장전하는 자포와 이를 발사하는 모포가 분리되어 연속 사격이 가능한 무기로, 임진왜란 이후 널리 사용되었다.
오른쪽 소포는 84mm 구경에 중량이 171kg으로 포구에서 화약과 포탄을 장전한 다음 뒤쪽 구멍에 점화하여 사격하는 방식이다. 사정거리는 300m이며 우리나라 재래식 화포 중 가장 발달된 형태를 갖추고 있다.
바다를 통해 침입하는 왜적의 선박을 포격하던 것이다.

 

 

 

갑곶돈에서 바라본 강화해협

 

 

 

강화전쟁박물관
강화에서 일어났던 전쟁을 주제로 각종 전쟁 관련 유물을 전시하고 연구, 보존, 수집을 위해 설립된 박물관이다.
미국에서 임시 반환된 어재연 장군의 수자기가 이곳에 전시되어 있다.

* 제1전시실 (주제관, 선사~삼국시대), 제2전시실 (고려시대), 제3전시실 (조선시대), 제4전시실 (근현대)
* 체험코너 : 항일의병 가상체험 (대동창의진의 부대원이 되어 항일의병 운동을 체험), 포토존 (세계 최초의 방탄조끼인 면제갑옷을 입고 기념촬영)
* 관람시간 : 09:00 ~ 18:00 (매표마감 17:30)
* 관람요금 : 어른 900원, 어린이/청소년/군인 600원 (갑곶돈 입장료에 포함되어 별도로 받지는 않음)
* 코로나19의 수도권 증가세로 현재 임시 휴관중

 

 

 

전쟁박물관 앞을 지키는 포도청 나리

 

 

 

고려궁지

Goryeo Palace site Ganghwa
사적 제133호
인천 강화군 강화읍 북문길42


 

 

 

고려궁지 입구
이곳은 고려시대 궁궐이 있던 곳이다.

* 입구에서 QR코드와 체온측정후 입장
* 입장료, 주차비 무료 (고려궁지주차장, 용흥궁공원주차장)

 

 

 

고종19년(1232년) 몽고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하여 최우의 권유로 도읍을 송도에서 천혜의 요새인 강화도로 옮겼다. 이때 옮겨진 도읍터가 고려궁지로 원종11년(1270년) 개성으로 환도할 때까지 38년간 사용되었다.

 

 

 

1961년 고려궁지의 모습
1636년 병자호란시 강화성이 청나라 군에게 함락되고, 병인양요 등 여러차례 전란을 겪으면서 궁궐과 성은 무너져 대부분 소실되고 말았다.

 

 

 

강화유수부 동헌

*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5호

조선시대에는 궁궐터였던 이곳에 행궁, 유수부 건물과 함께 민가까지 들어서면서 고려시대 궁궐의 모습이 사라졌다.
인조9년(1631년)에 행궁을 건립하였고, 인조16년(1638년)에 유수부 동헌을 건립하였다. 그후 이방청, 장녕전, 만녕전이 차례로 세워져 조선 궁궐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명위헌'이라는 현판은 영조 때 명필인 백하 윤순이 쓴 것이다.
동헌 입구 좌측에는 수령이 약400년된 느티나무가 영욕의 세월속에서도 고궁터를 찾는 길손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다.

 

 

 

조선시대 강화의 행정 책임자인 유수가 업무를 보던 중심 건물이다.
앉아있는 강화유수 양 옆으로 우측에는 좌열별장과 그 옆으로 공방, 이방이 서있고, 좌측에는 우열별장과 호방, 병방이 차례로 서 있다.

 

 

 

외규장각
정조6년(1782년) 왕실 관련 서적을 보관할 목적으로 왕립도서관인 외규장각을 건립하였다.
왕실과 국가 주요 행사의 내용을 정리한 의궤 등의 서적과 왕실물품을 보관한 곳이다.

 

 

 

병인양요때 프랑스군이 강화도를 습격하면서 외규장각 안에 보관중이던 서적과 의궤를 약탈해가고 건물은 불태워졌다.
당시 프랑스 군의 눈을 자극한 것도 외규장각에 보관중이던 은괴 19상자와 함께 채색비단 표지에 선명한 그림으로 장식된 어람용 의궤들이었다.
1955년부터 2001년에 걸쳐 발굴조사를 통해 2003년에 건물을 복원하였다.

 

 

 

외규장각 내부
신발을 벗고 내부에 들어가 볼수 있다.
외규장각의 역사부터 왕실 주요 행사와 의궤, 어람용 의궤와 분상용 의궤, 현장기록화, 반차도, 빼앗긴 보물까지 모든것을 볼수 있다.

 

 

 

왕실 주요 행사와 의궤

 

 

 

강화 외규장각 의궤 귀환
1975년 박병선 역사학자에 의해 강화 외규장각 의궤가 프랑스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이후 박병선 박사와 시민단체, 정부가 의궤 반환운동을 추진하였고, 1993년 <수빈휘경원원소도감의궤,1822년(순조22)> 1권이 먼저 반환되었다.
2010년 서울에서 개최된 G20 정상회의 중 양국 정상의 합의로 외규장각 의궤가 돌아오게 되었다.
프랑스국립도서관에서 잠자고 있던 강화외규장각 의궤 297권이 145년만에 모두 고국의 품으로 돌아온 것이다.

 

 

 

강화동종각
외규장각에서 왼쪽으로 가면 강화동종각이 세워져 있다.
강화 동종은 강화산성 성문을 열고 닫을때 쳤던 종으로 강화산성 남문에 걸려있던 종이다.

 

 

 

강화동종

보물 제11호

동종 명문에 숙종14년(1688년)에 만들어진 옛 종은 사인이 만들고 금이 가서 소리가 고르지 못해 숙종37년(1711년)에 다시 만들때는 조신이 만들었다고 새겨져 있다.
사인비구는 8개의 동종을 제작했는데 모두 보물11호로 지정되었으며, 강화동종은 8개 중 하나다. 이 종은 강화동종을 복제한 것으로, 원래 종은 강화역사박물관으로 옮겨 보관 전시하고 있다.

 

 

 

이방청으로 가는 문
강화유수부 안에 있는 6방(이.호.예.병.형.공방)의 건물중 이방의 집무실로 조선 중기의 관청 건물이다.

 

 

 

강화유수부 이방청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6호

효종5년(1654년)에 유수 정세규가 세웠으며, 정조7년(1783년)에 유수 김노진이 건물 내부를 고쳐 '괘홀당'이라고 불렀다.
나무로 된 1층의 기와집으로 ㄷ자형이며, 지붕 옆면은 여덟 팔자 모양의 팔작지붕으로 된 집이다.

 

 

 

여러차례 고쳐서 옛날 관청의 모습을 잘 알수는 없으나, 조선시대 지방관아의 이방청을 살펴볼수 있는 귀중한 자료다.

 

 

 

강화산성 북문

Ganghwasanseong Fortress (North Gate)
사적 제132호
인천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 783-2


 

 

 

 

진송루
강화산성은 고려가 몽골의 침입에 대항하여 개경에서 강화도로 수도를 옮겼을때 도성으로 쌓은 것으로, 내성, 중성, 외성으로 이루어졌었다. 내성은 1259년 몽골에 의해 헐린 후 조선시대에 돌로 다시 쌓았다.

* 주차 : 4~5대 정도 주차공간 있음 (주차비 입장료 없음)

 

 

 

병자호란때 청나라 군에 의해 다시 파괴되자 조선 숙종3년(1677년)에 크게 넓혀 다시 고쳐 쌓았다.
북문은 본래 누각이 없었으나 조선 정조7년(1783년)에 강화 유수 김노진이 누각을 세우고 진송루라고 하였다.

 

 

 

그 뒤 북문은 전쟁으로 부서지고 석축만 남아 있었으나 1977년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성벽을 따라가면 북장대로 갈수 있다.

 

 

 

강화산성 서문
1967년 서문의 모습, 서문 안팎 영옆으로 초가집들이 들어선 풍경이 인상적이다. 현재는 초가집들이 있던 자리는 쉼터로 정비되었다.

* 고려궁지 부근에 용흥궁과 성공회강화성당도 가볼만하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하고 고맙습니다
오늘도 좋은날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