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 정족산, 전등사 정족산사고와 성돌이길

2013. 6. 2. 22:21+ 카메라를 들고 떠나다/문화유산 답사기

 

전등사 정족산 사고와 성돌이길의 풍경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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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17

ⓒWonHaeng.com, Photographed by BayZer™

 

 

 

 

 

정족산 사고 앞뜰에 작은 돌탑들이 쌓여있다.

 

 

 

 

 

숙종 때인 1678년, 조선왕조실록을 전등사에 보관하기 시작하면서 전등사는 왕실종찰로서 더욱 성장했다.
본래 왕실에서는 실록을 4부씩 만들어 궁궐 내의 춘추관과 충주, 성주, 전주 등 네 군데의 사고(史庫)에 보관하도록 했다. 하지만 임진왜란 때 모두 소실되고 전주 사고만 무사했다. 이때 전주 사고본이 보존된 것만 해도 우리 역사에서 천만다행한 일이었다.

조정에서는 임진왜란 후 전주 사고본을 4부씩 옮겨 적게 하여 전주 사고본은 강화도 전등사로 옮겼고, 다른 실록은 봉화군 태백산, 영변 묘향산, 평창 오대산에 각각 보관하게 했다.

 

 

 

 

 

1910년 일제에 의해 국토가 강점되면서 정족산 사고본은 태백산사고의 실록 및 규장각의 도서와 함께 조선총독부 학무과 분실에 이장 되었다가 1930년 경성제국대학으로 옮겨진 후 광복과 함께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보관되어 오고 있다.

 

 

 

 

 

본래의 정족산 사고는 1931년 무렵 주춧돌과 계단석만 남긴 채 파손되어 빈터만 남아 있던것을, 전등사에 보존되어 오던 ‘장사각’과 ‘선원보각’이라는 당시의 현판과 함께 1999년 복원되어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사고 주변에는 노송들이 오랜 세월을 지키고 서있다.

 

 

 

 

 

 

 

 

 

 

 

 

 

 

 

 

 

 

 

 

 

 

 

 

 

사고 뒷편 정족산 등산로를 따라 올라가면 성돌이길이 나온다.
이곳에서 왼쪽 방향으로 가면 남문까지 이어지고 오른쪽 방향은 달맞이고개가 나온다.

 

 

 

 

 

정족산 정상 부근에서 전등사의 전경을 보기위해 일단 서문방향으로 길을 잡았다. 오르다보면 서문은 이용되지 않아 언제 지났는지 알수도 없이 정상까지 오르게 된다.

 

 

 

 

 

 

 

 

 

 

구름이 너무 멋진 하늘이다.

 

 

 

 

 

정상에 오르기전 산 아래로는 넓은 평야와 강화 앞바다가 한눈에 펼쳐진다.

 

 

 

 

 

 

 

 

 

 

 

 

 

 

 

 

 

 

 

 

정족산성의 유실된 부분은 이렇게 다시 복원되어 있다. 아마도 오랜 시간이 지나야 세월의 흔적이 묻은 제모습을 찾을 수 있을것만 같다

 

 

 

 

 

정상까지는 그리 멀지 않다. 이렇게 낮은 산이지만 산아래 풍경이 멋진곳도 아마 없을 듯 하다.

 

 

 

 

 

 

 

 

 

 

전등사의 전경을 볼 수 있는 포인트에서 전등사를 담고있는 별란초님~~
실은 전등사의 야경 (불켜진 연등의 모습)을 찍으려고 6시에 도착했지만, 해가 그렇게 늦게 떨어질줄은 몰랐다.

 

 

 

 

 

아름드리 숲속에 자리잡은 전등사의 모습..

 

 

 

 

 

망원으로 댕겨보니 사람들이 엄청 많았었는데 이 사진에서는 한산해 보이기까지 하다.

 

 

 

 

 

전등사 관리소측에 전화를 해보니 8시에 연등에 불을 켠다고 한다. 두시간이나 남아있는 상황..

 

 

 

 

 

낮은산도 산인지라 바람이 얼마나 차던지 한낮의 더위만 생각하고 겉옷을 챙기지 않았더니 추워지기 시작했다.

이런저런 사진을 찍으며 시간을 보내는 중..

 

 

 

 

 

한시간이 지난 7시가 되서야 야경은 포기하고 남문방향으로 내려왔다.

 

 

 

 

 

남문 종해루의 모습으로 전등사 출입구중 문루가 있는 유일한 문이다.

 

 

 

 

 

 

 

 

 

 

삼랑성 (정족산성)
사적 제130호
정족산성이라고도 하는 삼랑성의 동문으로 쌓은 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단군이 세 아들에게 성을 쌓게하고 이름을 삼랑성이라 했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보인다.
처음에는 흙으로 쌓은 토성이었는데 삼국시대에 이르러 그 위에 막돌을 맞추어가며 쌓았고 성체 안에는 막돌을 채운 튼튼한 석성으로 축조되었다.
전등사를 둘러싸고 있는 성으로, 고려시대에는 가궐, 조선시대에는 사고와 선원보각이 있었다. 병인양요 때 양헌수 장군이 프랑스군을 물리쳐 이곳에 보관된 조선왕조실록과 왕실 족보인 선원보를 지켜냈다.

 

 

 

 

 

양헌수 승전비
인천시 기념물 제36호
1866년 병인양요때 프랑스군을 물리친 양헌수 장군의 공적을 기리는 승전비로 양헌수를 비롯한 367명이 프랑스 군대를 맞아 활약한 당시의 상황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삼랑성 동문으로 들어가면 오른쪽에 위치해 있다.

 

 

 

 

 

비의 앞면에는 "순무천총양공헌수승전비"라 새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