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57년 부처님 오신날, 강화 전등사를 가다

2013. 5. 19. 00:54+ 카메라를 들고 떠나다/문화유산 답사기

 

불기 2557년 부처님 오신날, 강화 전등사를 가다.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635
37 Photos
2013.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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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이 보관되었던 정족산 사고가 있는곳, 부처님 오신날을 맞이하여 전등사에 다녀왔다.

 

 

 

 

 

전등사 윤장대

윤장대란 불교경전을 넣은 책장에 축을 달아 돌릴 수 있게 만든 것으로, 윤장대를 한번 돌리면 경전을 읽은 것과 같은 공덕이 있다고 한다. 전등사 윤장대는 보물 제684호를 똑같이 재현한 것이다.

 

 

 

 

 

대조루를 오르는 계단에 연등터널이 설치되어 있다.

 

 

 

 

 

 

 

 

 

 

전등사는 고구려 소수림왕 때 신라로 불교를 전파하러 가던 아도화상이 잠시 머무르며 지은 절로 옛날 이름은 진종사였으며, 고려 말 충렬왕 비인 정화궁주가 이곳에 옥등을 시주한 것 때문에 전등사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전등사는 호국기도 도량으로 널리 알려져 창건 이래 나라의 역사를 움직였던 인사들이 꾸준하게 찾는 수도권 최고의 기도 도량으로 손꼽힌다.

 

 

 

 

 

 

 

 

 

 

전등사 대웅전 (보물 제178호)
조선 광해군 13년(1621)에 다시 지은 목조건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이다. 기둥 가운데 부분을 둥글게 하여 안정감을 주었으며 네모서리 기둥 윗부분에는 벌거벗은 여인상을 조각하였다.

 

 

 

 

 

대웅전 내부에는 삼존불이 모셔져 있으며, 천장은 용, 극락조, 연꽃 등으로 화려하게 채색하였고, 부처를 모신 불단과 닫집의 장식 또한 화려하다.

 

 

 

 

 

여인상의 전설

17세기 말, 당시 나라에서 손꼽히는 도편수가 대웅보전 건축을 지휘하고 있었다. 고향에서 멀리 떠나온 그는 공사 도중 사하촌의 한 주막을 드나들며 그곳 주모와 눈이 맞았으며 사랑에 눈이 먼 도편수는 돈이 생길때마다 주모에게 모조리 건네주었다.
도편수는 주모와 함께 살게 될 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대웅보전 불사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공사 막바지에 이른 어느날 주막으로 찾아가보니 여인은 어느새 야반도주를 해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여인에 대한 배반감과 분노 때문에 잠도 오지 않았지만 마음을 다잡고 대웅전 공사를 마무리했다. 도편수는 사랑을 배반하고 도망친 여인을 대웅전 처마 네 군데에 벌거벗은 여인상으로 조각하였으며, 나쁜 짓을 경고하고 죄를 씻게 하기위해 힘들게 추녀를 받치게 하였다고 한다.

 

 

 

 

 

이 네가지 조각의 나부상은 제각각 다른 모습으로 처마를 받치고 있는데, 두손을 올린것도 있고, 왼손이나 오른손으로만 처마를 떠받든 조각도 있으며, 옷을 걸친 것도 있다.

 

 

 

 

 

 

 

 

 

 

전등사 대조루 (인천시 문화재자료 제7호)

전등사 경내로 들어서는 입구에 세운 누각으로 언제 지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고려 말 대학자 목은 이색의 "전등사시"에서 대조루를 읊은 시구가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 말에는 이미 대조루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왼쪽부터 배중손, 정화궁주, 이색의 등이 설치되어 있다. 모두 전등사와 관련 깊은 인물이라고 한다.

 

배중손 (고려 무장)
고려 원종 때의 무장으로 삼별초의 대몽항전을 이끈 장수다. 원종이 개성으로 환도한 후에 강화에 있던 야별초를 이끌고 강화도를 떠나 진도에 근거를 정하고 섬 안에 성곽을 쌓고 궁전을 지어 장기항전의 태세를 갖추었다. 1271년 여.몽 연합군의 총공세를 맞아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나 패배하여 삼별초의 진도 근거지가 함락되었고 이때 전사한 것으로 보인다.

 

 

 

 

 

정화궁주 (고려 충렬왕의 비)
정화궁주가 옥등을 부처님께 바치는 모습이다.
고려 25대왕인 충렬왕이 태자일때 정비로 맞이한 분으로 충렬왕이 왕이 되면서 원나라(몽고) 제국대장공주와 강제로 결혼하면서 항상 별궁에 거처하고 충렬왕과 가까이 하지 못하였다. 정화궁주는 슬픔을 달래고 착실히 불도를 섬기기 위해 당시 진종사라 불리던 이곳을 원찰로 삼았으며, 인기스님에게 부탁하여 송나라에 가서 대장경을 인쇄하여 이 절에 두게하고, 옥등을 시주하였다.

대장경과 옥등은 법등(부처님의 말씀)을 상징하며, 등을 전하여 전등사라고 하였다.

 

 

 

 

 

이색 (고려 문신이자 유학자)
호는 목은으로 고려 말 야은 길재, 포은 정몽주와 더불어 삼은의 한 사람이다. 공민왕과 우왕, 공양왕때 높은 벼슬에 올랐으나 정몽주가 피살된 후 금천, 여흥, 장흥 등지로 유배되기도 했다.
조선 개국 후 태조는 그의 재능을 아껴 출사를 종용하였으나 끝내 고사하였다. 문하에 권근, 김종직, 변계량 등을 배출하여 조선 성리학의 주류를 이루게 하였으며, 불교에 대한 조예도 깊었고, 고려 말에 학문과 정치에 거족을 남긴 인물이었다.
이색은 이곳 전등사를 찾아 "대조루에 올라서서" 라는 시를 남겼는데, 이 시에서 전등사와 정화궁주의 인연을 알려준다.

 

 

 

 

 

 

 

 

 

 

 

 

 

 

 

 

 

 

 

 

 

 

 

 

 

 

 

 

 

 

저녁 8시 즈음에 연등을 나눠주었다. 불을 붙여주고 있는 별란초님..

 

 

 

 

 

 

 

 

 

 

 

 

 

 

 

 

 

 

 

 

 

 

 

 

 

 

 

 

 

 

 

 

 

 

 

 

 

 

 

 

 

 

 

 

 

 

 

 

 

 

 

 

 

 

 

 

 

 

 

 

성불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