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카메라를 들고 떠나다/관람전시 이야기

[인천 수도국산 달동네박물관] 70년대 달동네 삶을 재현하다

BayZer™ 2021. 4. 5. 20:41

관람전시 이야기
인천 송현동

Photographed by BayZer™

2021.04.04

 

 

 

비온 다음날이라 미세먼지 없는 쾌청한 하늘이다.
휴일 아침 가볼만한 곳을 찾다가
수도국산 달동네 박물관으로 향한다.

 

 

 

개관했을 당시에 다녀왔었는데 그때와는
주변 환경이 너무 많이 변해 있었다.
박물관 입구로 가는길에 흐드러지게 핀 벚꽃들
박물관은 송현근린공원 내에 위치해 있다.
주차 : 박물관 주차장이 있지만 협소한 편 (무료)
휴일에는 박물관 앞 도로에 주차할수 있고, 주변 여러 골목에 주차라인이 그려져있어 그곳에 주차하면 된다.

 

송현근린공원 능소화터널 보러가기

https://wonhaeng.tistory.com/296

 

[인천 송현근린공원 능소화 터널] 능소화 사진찍기 좋은곳, 하늘생태정원

[인천 송현근린공원 하늘생태정원] 능소화 사진찍기 좋은곳 카메라를 들고 떠나다 / 사진찍기 좋은곳 인천 송현동 Photographed by BayZer™ 2021.07.03 오후부터 장맛비가 내린다길래 가깝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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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근래 벚꽃사진을 많이 담았던터라
그냥 지나칠까 하다가 그래도 몇장 담아본다.

 

 

 

동네 주민분들이 운동겸 많이들 나오셨다.
초상권 보호차원에서 앵글은 위로~~

 

 

 

전날 비가 온 탓에 꽃잎이 많이 떨어졌는데도
아직은 볼만한 풍경이다.

 

 

 

벚꽃길을 올라와서 돌아본 모습

 

 

 

야외에 전시되어 있는 재밌는 조형물들

 

 

 

우물 체험하는 곳도 있고,

 

 

 

말뚝박기 하던 어린시절을 떠올리게도 한다.

 

 

 

소박하게 꾸며진 꽃밭,,
자두나무 꽃도 활짝 피었고
다양한 색의 튤립도 서로 이쁨을 뽐내고 있다.

 

 

 

박물관 입구의 모습
매표소에서 요금을 계산하고 QR코드 인증과 체온 체크를 해야한다.

요금 : 어른 1,000원, 청소년 700원,
13세이하, 65세이상 무료
매월 마지막주 수요일은 문화가 있는 날 (무료 입장)
휴관 : 매주 월요일, 1월1일, 설날, 추석 당일
관람시간 : 09:00 ~ 18:00 (매표마감 17:30분)
방역소독 : 매일 09시, 13시, 17시
QR코드가 없으면 신분증으로 대체 가능

 

 

 

밤하늘의 달과 별이 보이는 동네, 달동네

 

 

 

매표소 옆으로 창영문구와 미담다방이 있다.

 

 

 

미담다방 내부,
안에 들어가볼수 있다.

 

 

 

당시의 물건들을 기증해 전시되어 있고
김장하는 모습도 재현되어 있다.

 

 

 

지하 관람실로 내려가는 길 벽에는
당시의 마을 풍경이 그려져 있다.

 

 

 

지하 상설 관람실의 모습

 

 

 

수도국산 달동네를 기억하시나요?
산꼭대기에 수돗물을 담아두는 배수지를
설치하면서 '수도국산'이라는 명칭이 생겨나게 되었다.

 

 

 

수도국산에 달동네가 생기기까지

 

 

 

우측에 있는 기념품판매소

 

 

 

철거 당시의 담장을 남겨 전시하였다.

 

 

 

허선화님의 수도국산 달동네라는 시

 

 

 

나에게 수도국산 달동네는 부끄럽거나
슬프거나 아픈곳이 아니었어요.
지금의 나를 살게하는 힘이지요
- 곽현숙

그때는 인정이 있었지.
우리 아이, 남의 아이 따로 없이
다 한가족 이었거든
- 허준권

 

 

 

달동네의 어제와 오늘

 

 

 

" 70년대 달동네 삶을 재현하다 "

 

수도국산 달동네 박물관의 상설전시실은
1971년 11월의 어느 날을 재현한 것이라고 한다.

 

 

 

송림복덕방
수도국산 달동네 초입에 자리했던 송림복덕방

 

 

 

미니연탄
동네 초입에 있었던 연탄가게

이 연탄가게의 주인인 유완선님은 수도국산 달동네가 사라질때까지 지게로 연탄을 배달했다. 1990년대 후반까지 달동네 사람들의 절반이 연탄에 의존해 겨울을 나야 했다.
한장에 4kg 가량인 연탄 25장을 등에 지면 이내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달동네라 고지대라는 이유로 가게에 연탄을 대 주지 않아 공장까지 찾아가 항의도 하곤 했었다. 재개발 이후 용인으로 이주하여 살고 있다.

 

 

 

은율솜틀집

솜틀집의 주인 박길주님,
1960년대 이전부터 동인천 구름다리에는 솜틀집이 모여 있었다. 한국전쟁때 황해도에서 피난 온 박재화씨(작고)는 고향 은율에서 하던 목화업을 이어 전동7번지 (옛 황인의원 근처)에서 "은율면업사"라는 솜틀집을 열었다.
박재화의 아들 박현석, 그리고 그 손자 박길주씨에 이르는 2000년도까지 3대째 솜틀집을 운영하였다.
고인 박길주의 유언으로 슴틀기를 본 박물관에 기증하였다.

 

 

 

대지이발관
솜틀집 옆에는 이발관이 자리하고 있다.

 

 

 

송현상회
늦은저녁 퇴근길의 아버지는 구멍가게에 들러서
자식들 좋아하는 과자와 과일들을 사
검정비닐 한봉지 손에들고 가파르고 좁은 골목길을
술기운에 흥얼거리며 걸어 올라갔을 것이다.

 

 

 

집앞까지 오면 굴뚝에서는 밥 짓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어느새 하늘에는 달과 별이 보인다.

 

 

 

먹을것 없던 시절이지만 정성 가득한
저녁상을 준비하는 우리네 어머니들

 

 

 

당시에는 수도가 집집마다 없어서
물지게를 지고 물을 파는 집에 가야했다.

 

 

 

담장에 5.16 군사혁명 특집화보가 붙어있다.

1961년 5월 16일 박정희의 주도로 육군사관학교 8기생 출신 군인들이 제2공화국을 폭력적으로 무너뜨리고 정권을 장악한 군사정변이다.
반공분단국가의 위기상황에서 권력을 지향한 군부세력이 불법적으로 합법적인 정부를 전복하여 권력을 장악한 사건으로, 이후 국가 주도의 급속한 경제발전으로 긍정적 평가를 받기도 하나, 군사문화의 사회확산, 군의 탈법적 정치개입의 선례를 남겼으며, 민주적 정권교체의 지연, 산업화의 지역, 계층간 불균형 등의 부정적 결과를 낳기도 하였다.

- 5·16군사정변 [두산백과]에서 옮김

 

 

 

골목 어귀 전봇대에서 흔히 볼수있었던 표어들
간첩을 신고하면 20만원 상금탄다~

 

 

 

달동네 집들은 경사면에 위치하고
좁은 공간에 여러 집이 있다보니
변소를 집집마다 둘 형편이 되지 않았다.
결국 공동으로 화장실을 설치하여 사용하였다.
요즘에는 볼수없는 리얼 푸세식~

 

 

 

담장에 빠지지 않는 포스터는 단연 영화 포스터다.
풀이 담긴 깡통과 붓을 들고
윗동네까지 걸어 올라가면
포스터 구경에 신난 아이들이 따라다닌다.

 

 

 

자투리 공간에 있는 장독대의 모습

 

 

 

다닥다닥 붙어있는 집들
지붕 재료였던 짚은 1971년부터 지붕 개량사업으로 초가 지붕은 슬레이트 지붕이나 기와 지붕으로 바뀌었다.
가난한 달동네 사람들은 지붕개량을 할 형편이 되지않아 '루핑'지붕을 했는데
루핑이란 두꺼운 종이 같은 섬유제품에 아스팔트를 먹인 지붕 방수재료이다.
왼쪽 집은 루핑, 오른쪽 집은 슬레이트다.
루핑은 바람이 세게 불면 날아가버릴수 있고, 슬레이트는 석면이 함유되어 있다.

 

 

 

달동네 주거 공간은 매우 비좁았다.
제대로 된 장을 놓을 공간도 없이...
비닐로 막아놓은 깨진 유리창은 열악한 환경을 말해준다.

 

 

 

검게 그을린 부엌 벽에는 주방도구가 걸려있고
선반에는 찌그러진 주전자가 보인다.
부뚜막에서는 때에 찌든 운동화를 말리고 있다.

당시의 부엌은 수납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상부 공간을 이용하는 특징을 가진다.

 

 

 

이리저리 얽혀있는 골목길
비좁은 길이지만 수많은 이야기가 남아 있는 길이다.

 

 

 

벽에 빈곳마다 벽보들이 덕지덕지 붙었다.
이또한 달동네 골목길의 풍경이 아닐런지~

 

 

 

아마도 그 시절에는 이랬었지 감회가 남다른 어르신들도 계실터~~

 

 

 

수도국산 달동네에는
경제적 형편이 어려워 학교에 다니지 못한
사람들이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모여서 공부할수 있는 야학당도 있었다.

 

 

 

안그래도 무서운 푸세식인데
붉은 전구를 장착한 변소(화장실)이 있는 집이다.
이 집만의 전용 변소인지도~~

 

 

 

안으로 들어가니 정면에 마루가 뙇!!!
문 위에 걸린 조상의 사진이 눈에 띈다.
가훈도 걸려있고, 도자기도 장식해 놓았다.
달동네에서도 좀 사는 집인 듯한 느낌이다.

 

 

 

살림도구가 많은 부엌의 모습
수납장도 있고,,

어지럽게 설치된 전선과 두꺼비집이 조금은 위험해 보인다.

 

 

 

가로등이 없던 시절에는
달빛이 길을 밝혀주었던 골목길,
가로등 하나가 외로이 골목을 지키고 있다.

 

 

 

맞은편 집 열린 창문으로 보이는
백열전구 불빛이 유난히 밝게 빛난다.
방 안 천정 도배지에 신문을 덧붙여 놓았다.
당시에는 흔한 일이었을 것이다.

 

 

 

부엌에는 때에 찌든 빨래들이 물에 담겨있고
생명을 다해 하얗게 질린 연탄은 갈아보기 체험도 할수 있다.

 

 

 

힘겹게 살았지만 다닥다닥 붙어있는
집 만큼이나 가까운 정으로 살아왔던 달동네 사람들..
한바퀴 둘러보는데는 그리 오랜시간이
걸리지 않지만, 세심한 부분까지 들여다보면 지루할 틈이 없는 길이다.

 

 

 

다시 처음 출발했던 곳으로 왔다.
자유공원과 동인천, 송현동 일대의 모습이
강화유리 아래에서 보여지고 있다.

 

 

 

달동네 풍경을 만들어 놓은 닥종이 인형

 

 

 

금곡동과 창영동의 옛모습을 볼수있는
기획전시실이 마련되어 있다.

 

 

 

1897.3.22 우각현 (지금의 도원역 인근)에서
거행된 경인철도 기공식,

요사이 경인철도 회사에서 역사를 크게 하는데 일하는 처소에 구경꾼이 너무 많아 일할수 없는 고로 순검을 세우고 잡인을 금하는데 그 회사에 일하는 서양 사람 중에 몇몇이 우리나라 사람 대접하기를 마치 년전에 청인이 하듯 하여 흔히 때린다니 듣기에 매우 분한지라 일없는 이는 배다리 근처에 가지 마시고 또한 거기서 일하는 이들은 아무쪼록 무리한 일과 염치없는 일은 말고 자기 맡은 직책만 잘하여 대한국 자유 백성된 명예를 손상치 마시오.
- 협성회회보 13호, 1898년3월26

 

 

 

(구) 조흥상회
조흥상회는 1955년 건축된 맛배지붕의 조적조 2층 건물로 배다리 초입에 위치해 목 좋은 상가로 유명하였다.

 

 

 

'제물포 북동쪽에 위치한 빈민가'로 표기된 이 사진은 1900년 인천의 조선인 마을 풍경을 찍은 것이다.
사진상에는 정확한 위치를 표기하지 않았으나, 조계지 북동쪽에 자리한 송현, 우각동 일대였을 가능성이 있다.
초가집은 전형적인 일자 구조로 창문을 개조하여 점방 형태를 갖추었다.
이러한 형태의 상점들이 쇠뿔고개를 따라 늘어섰을 것으로 추정한다.

 

 

 

영상으로 나오는 사진들~

 

 

 

 

기획전시실에 설치된 포토존

 

 

 

외국인을 위한 안내문도 준비되어 있고,
인증 촬영을 한후 관람을 모두 마쳤다.

 

 

 

밖으로 나오니 멋지게 변해 있는 하늘.
솜사탕같은 흰구름이 뭉실뭉실~~

 

 

 

예쁜 하늘을 배경으로 다시 담아본다.

 

 

 

주차장 쪽에서 담은 벚꽃

 

 

 

아이들과 함께 하면 좋은 레트로 감성 여행
아이가 없어도 옛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삶의 고달픔과 애환이 담겨있는 달동네로의 여행을 마친다.

 

 

 

마지막으로 도로로 나오면
지역 일대를 전망할수 있는 데크가 설치되어 있고,
그 앞에 어영대장 신정희 동상이 있다.

신정희 (순조33 ~ 고종32)는 조선 말기의 무신으로 자는 중원이고 호는 향농이며, 본관은 평산으로 신헌의 아들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1864년 승지, 1867년 훈련원 도정, 1877년 포도대장, 이듬해 어영대장이 되어 고종황제의 명에 따라 외세의 침범에 대비하기 위해 인천에 포대를 설치하였으며, 그중 하나를 화도진이라 명명하고 서해안 방어를 맡게 해 군사 요충지로 삼았다.
인천 동구청에서 이를 기리기 위해 매년 5월이면 화도진축제를 개최하고 신정희 어영대장 축성행렬을 하고 있다.

이 전망데크 및 동상은 "발전소 주변지역 지원에 관한 법률"에 의한 지원금으로 설치된 것이다.

- 안내문에서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