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천 안중근공원] 76주년 광복절, 안중근 의사 의거 112주기를 따라가다

2021. 8. 14. 16:50+ 카메라를 들고 떠나다/관람전시 이야기

[부천 안중근공원]
76주년 광복절, 안중근 의사 순국 111주기, 의거 112주기 그 생애를 따라가 본다

카메라를 들고 떠나다 / 전시관람 이야기
경기도 부천 송내대로 236

Photographed by BayZer™

2021.08.13

 

 

 

안중근공원


안중근공원 입구
위치 : 송내대로와 길주로가 만나는 송내대로사거리 무지개고가교 옆 뉴코아아울렛 건너편
부천시청역 3번출구에서 도보 2~3분 소요
주차 : 안중근공원공영주차장
최초30분 900원, 10분초과시마다 400원 추가
장애인, 국가유공자, 65세이상 노인 50% 할인 (2시간 무료), 경차 50% 할인
부천시 거주 네자녀 가정 무료, 세자녀 50%, 두자녀 20% 할인

 

 

 

 

광복절 제76주년
내일은 올해로 76주년을 맞이하는 광복절이다.
단순히 휴일로 생각되기도 하고, 월요일 대체공휴일까지 연휴로만 기억되는 현실~

 

 

 

뜻 깊은 곳을 가보기 위해 7월에 능소화를 담기위해 부천중앙공원에 가다가 우연히 알게 된 안중근공원이 생각나 휴가주간에 방문해 보았다.
입구에서 바라본 조형물과 뒤로 보이는 안중근 의사 동상.
부천에 있는 공원들 중에서도 비교적 덜 알려진 공원이다.

 

 

 

안중근 의사 동상
원래 안중근 의사 동상은 역사적 의거 현장인 중국 하얼빈시 중앙대가에 2006년1월16일에 세웠다가 11일만에 실내로 이전 보존했다.
우국충정으로 동상을 제작했던 안중근 의사 동상건립위원회에서 안중근평화재단 청년아카데미를 통해 2009년10월12일 부천시에 기증했다고 한다.

 

 

 

부천시는 원래 명칭이었던 중동공원을 안중근공원으로 변경하고 안중근 의사 의거 100주년 기념으로 그 민족정신을 널리 알리기 위해 2009년10월26일 이 자리에 동상을 세웠다.

 

 

 

기념비
부천시와 중국 하얼빈시는 1995년11월28일 자매결연을 체결하여 10주년이 되는 해에 이를 기념하기 위해 기념비를 세웠다.

 

 

 

하얼빈에 있던 안중근 의사 동상이 부천에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안중근 의사 부조벽화
안중근공원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동상 옆에 설치된 부조벽화라고 할수 있다.

 

 

 

안 의사의 일대기를 주요 활동별로 정리해 놓은 곳이다.

 

 

 

의거 112주기가 되는 올해, 안 의사의 생애를 천천히 따라가 보기로 한다.

 

 

 

안중근 의사 연보


안중근 의사 연보
1879년 9월 2일 : 순흥 안씨 안태훈공의 장남으로 황해도 해주부에서 탄생하다.
1884년 6세 : 조부와 부친을 따라 신천군 두라면 청계동으로 이사하다.
1894년 16세 : 동학을 빙자하여 양민을 괴롭히는 무장 폭도들을 진압하다. 김아령과 결혼하여 2남 1녀를 두다.
1895년 17세 : 천주교에 입교하여 홍석구 신부로부터 영세를 받고 <도마>라는 믿음의 이름을 받고 홍신부와 함께 황해도 지방을 순회 전도하다.
1905년 12월 27세 : 일본의 불법 침략을 세계 각국에 호소, 국권을 회복하기 위하여 청국 상하이로 여행하다. 귀국, 부친 별세, 청계동에서 장례식 엄수.
1906년 3월 28세 : 청계동을 떠나 진남포로 이사한 후 가산을 기우려 삼흥학교와 돈의학교를 운영하여 구국영재를 양성하다.
1909년 2월 31세 : 노령 <카리>에서 12동지와 단지혈맹, 이 피로 태극기에 대한독립 넉자를 쓰고 조국과 민족을 구하기로 하늘과 땅에 맹세하다.
1909년 10월 26일 : 하얼빈 역두에서 동양 평화를 파괴하는 침략의 원흉 일본의 이등박문을 사살함.
1910년 3월 9일 : 홍신부로부터 안의사의 영생영락을 위하여 고해성사와 미찰성제대례, 예수님의 성체성혈 받아보시는 대례식에 감옥소의 일반관리들이 모두 와서 참례했다.
여순감옥에서 검찰관, 전옥, 통역, 간수정과 두 변호사의 입회하에 정근, 공근 두 아우와 홍신부를 면회하고 동포에게 고하는 최후의 유언을 남기다. 옥중자서전, 유묵, 동양평화론 등을 쓰다.
1910년 3월 26일 : 안 의사 의거후 152일이 되는 3월26일 상오10시에 집행되다. 어머님께로 부터 보내온 한복을 갈아입고 여순감옥 형장에 임하여 "나는 동양평화를 위하여 한 일이니 한 일 양국은 동양평화를 위하여 서로 협력해 주기를 바란다"는 간곡한 부탁을 남기고 순국하시다.
의사의 유해는 보통 사형수와 달리 새 송판으로 침대관을 지어 입관 하고 의사께서 몸에 품었던 예수님의 성화를 덮어 여순감옥 수인 묘지에 안장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음.

 

 

 

국채보상운동
1907년 대구에서 일어난 국채보상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대되자 안중근은 이 운동에 적극 참여, 국채 보상회 관서지부를 설치하고 1천여명의 선비들이 모인 평양 명륜당에서 의연 금을 내도록 권유하였을 뿐 아니라 자기 아내와 제수들에게도 권고하여 반지 패물까지 헌납하도록 하는 등 열성적으로 구국을 위한 활동을 펼친다.

 

교육운동
삼흥학교와 돈의학교를 운영하는 등 조국과 민족을 되살리기 위해 활발한 교육활동을 펼친다.

 

 

 

독립운동


독립이라는 글과 함께 새끼손가락보다 짧아진 네번째 손가락이 안 의사의 모든걸 말해준다.

 

 

 

북간도와 연해주의 독립운동
의병으로 구국을 도모하고자 했던 안의사는 1908년 국내진입작전을 전개한다. 이때 생포한 포로를 만국공법에 의해 석방하는 등 안의사의 평화사상이 보여진다.
안중근의사는 북간도를 거쳐 한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러시아령 연해주에 도착, 한인 의병대열에 참여하여 이범윤, 김두성 등과 의병을 양성하고, 다음해 30세 되던 1908년 봄 김두성을 총독, 이범윤을 대장으로 한 대한국 의군창설에 성공한 안의사는 참모 중장으로 선임되어 독립특파애장의 이름을 띠고 치열한 항일 투쟁을 결행하기 시작하였다.
그해 7월에는 의병 300여명을 사살하고 그대로 일군의 주요기지인 해령으로 진격하여 5,000여명의 일본수비군들을 격퇴하는 등 13일 동안 30여 차례 교전을 했다.

 

 

 

조국을 떠나면서 남긴 글
"사나이, 큰 뜻을 품고 타국으로 떠나가니
살아서 성공 못하면 죽어서 돌아오지 않으리.
유골을 구태여 선조의 무덤 옆에 묻으랴
세상엔 가는 곳마다 청산이 무진한데"
뜻을 이루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보이는 글이다.

 

 

 

독립운동중 어려움 속에 남긴 글
男兒有志出洋外 事不入謨 難處身
남아유지출양외 사불입모 난처신
望順同胞警流血 莫作世間無義神
망순동포경류혈 막작세간무의신

"사나이 뜻을 품과 나라 밖으로 나갔다가
큰일을 못 이루니 몸 두기 어려워라
바라건대 동포들아 죽기를 맹세하고
세상에 의리 없는 귀신은 되지들 마오!"

안의사가 독립군으로 전쟁에서 승리도 하곤 했지만 그 작은 전쟁으로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항상 쫓기는 어려움이 얼마나 컸는지 고백하고 있다. 또 힘을 합쳐 숨겨주고 도와주어야 할 동포들의 도움도 못 받는 심정을 실토하고 있는 글이다.

 

 

 

동의단지회
1909년 초 11명의 동지들과 국가를 위하여 몸을 바치고 일심단결하여 국권을 회복하고자 단지동맹을 맺는다.
조국의 독립과 동양평화를 위하여 1909년 2월 노령 카리에서 동지 11명과 한자리에 모여 왼손 무명지를 짤라 그 피로 태극기에 <대한독립> 넉자를 쓰고 하늘과 땅에 맹세하였다.
단지혈맹동지 12인
안중근, 김기룡, 강순기, 정원주, 박봉석, 류치홍, 조순응, 황병길, 백규삼, 김백춘, 김천화, 강창두

 

 

 

단지동맹 취지문
"오늘날, 우리 한국 인종이 국가가 위급하고 생민이 멸망할 지경에 당하여 어쩌하였으면 좋을지를 모르고
혹 왈 좋은 때가 되면 일이 없다 하고, 혹 왈 외국이 도와주면 된다 하나 이 말은 다 쓸데없는 말이니 이러한 사람은 다만 놀기를 좋아하고 남에게 의뢰하기만 즐겨하는 까닭이라.

우리 2천만 동포가 일심 단체하여 생사를 불고한 연후에야 국권을 회복하고 생명을 보전할지라.
그러나 우리 동포는 다만 말로만 애국이니 일심단체니 하고 실제로 뜨거운 마음과 간절한 단체가 없음으로 특별히 한 회를 조직하니,
그 이름은 동의단지회(同義斷指會)라.

우리 일반 회우가 손가락 하나씩 끊음은 비록 조그마한 일이나
첫째는 국가를 위하여 몸을 바치는 빙거요,
둘째는 일심 단체하는 표라,
오늘날 우리가 더운 피로써 청천백일지하에 맹세하오니 자금 위시하여 아무쪼록 이전허물을 고치고 일심 단체하여 마음을 변치말고 목적에 도달한 후에 태평동락을 만만세로 누리옵시다"

- 안의사께서 작성한 단지동맹을 통하여 결성한 동의단지회 취지문

 

 

 

장부가
장부가 세상에 처함이여 그 뜻이 크도다
때가 영웅을 지음이여 영웅이 때를 지으리로다
천하를 웅시함이여 어느 날에 업을 이룰고
동풍이 점점 참이여 장사의 의기가 뜨겁도다
분개히 한 번 감이여 반드시 목적을 이루리로다
쥐도적 이등이여 어찌 즐겨 목숨을 비길고
어찌 이에 이를 줄을 시아렸으리오 사세가 고연하도다
동포 동포여 속히 대업을 이룰지어다
만세 만세여 대한독립이로다
만세 만세여 대한 동포로다
- 1909년 10월 23일 밤 의거전 하얼빈에서 지은 시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


평화와 정의의 현장 하얼빈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는 이토의 하얼빈 방문 소식에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와 의거를 계획하고 26일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다.

 

 

 

이토 히로부미의 15가지 죄악
1. 한국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
2. 한국 황제를 폐위시킨 죄
3. 을사 5조약과 7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죄
4. 독립을 요구하는 죄없는 한국인들을 마구 죽인 죄
5. 정권을 강제로 빼앗아 통감 정치 체제로 바꾼 죄
6. 철도, 광산, 산림, 농지 등을 강제로 빼앗은 죄
7. 제일은행군 지폐를 강제로 사용하여 한국 경제를 혼란에 빠뜨린 죄
8. 한국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킨 죄
9. 민족 교육을 방해한 죄
10. 한국인들의 외국유학을 금지시키고 한국을 식민지로 만든 죄
11. 한국사를 없애고 교과서를 모조리 빼앗아 불 태워 버린 죄
12. 한국인이 일본인의 보호를 받고자 한다고 세계에 거짓말을 퍼뜨린 죄
13. 현재 한국과 일본 사이에 전쟁이 끊이지 않고 있는데 한국이 아무 탈없이 편안한 것처럼 위로 일본 천황을 속인 죄
14. 대륙을 침략하여 동양의 평화를 깨뜨린 죄
15. 일본 천황의 아버지 태황제를 죽인 죄

 

 

 

이토 히로부미의 죄상 15개조
이토 히로부미의 죄상 15개조라는 글이 검은빛의 울퉁불퉁한 바위에도 새겨져 있다.

 

 

 

각국의 반응
한국에 이어 만주를 삼키려던 일본 제국주의 침략의 우두머리인 이토 히로부미의 피살에 대한 일본영사관의 전보는 실로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었으며, 온 세계가 떠들썩 했다.
동경 일일신문과 대한매일신보 등의 호외가 나왔고 해외에 망명 독립운동을 하던 우국 지사들은 환호의 찬사를 보냈으나 조정의 친일파들은 오히려 당황했다.
중국은 또한 자기들의 원수를 갚은 것처럼 생각하며 기뻐했다.
당시 중국의 국가 주석이었던 원세개도 안의사의 의거를 듣고 다음과 같은 글을 지어 찬양했다.

안중근 의사 만 (安重根義士輓)
平生營事只今畢 死地圓生非丈夫
평생영사지금필 사지원생비장부
身在三韓名萬國 生無百世死千秋
신재삼한명만국 생무백세사천추
평생을 벼르던 일 이제야 끝났구려
죽을 땅에서 살려는 것은 장부가 아니고 말고
몸은 한국에 있어도 세계에 이름 떨쳤소
살아선 백살이 없는데 죽어서 천년을 가오리다

 

 

 

안중근 의사의 법정투쟁


장부다운 기품, 의병다운 의병의 태도
안중근 의사는 하얼빈 의거가 한국의 독립과 동양평화를 위해 거행된 것임을 분명히 밝힌다. 그러나 일본 법정은 1910년 2월 14일 마지막 공판에서 사형을 언도하였다.
안의사는 "사형"이라는 언도를 받자 일본에서는 사형 이상의 형벌은 없느냐고 이 판결에 미소를 지었다고 한다. 이러한 안의사의 태도는 다시 살아날 수 있는 길일지도 모를 상고를 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2월19일 안의사가 공소권을 포기하자 일본정부는 크게 놀랐다. 이는 장부다운 기품이며 의병다운 태도였다. 안의사가 상고하지 않은 것은 그의 굳은 뜻이었다.

 

 

 

의거의 이유
내가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것은 한국 독립전쟁의 한 부분이요,
또 내가 일본 법정에 서게 된 것은 전쟁에서 패배한 포로가 된 때문이다.
나는 개인 자격으로서 이 일을 행한 것이 아니요
대한민국 의군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조국의 독립과 동양 평화를 위해서 행한 것이니
만국 공법에 의하여 처리하도록 하라.
- 안의사께서 일본 법정에서 외친 것

 

 

 

옥중에 남긴 글
5개월 동안 뤼순감옥에서 자서전 <안응칠역사>와 한국독립을 위해 나아갈 길을 제시한 <동양평화론>을 집필한다.

동양평화론
안중근 의사는 동양이 평화로울수 있는 방법을 담은 <동양평화론>이라는 글을 남겼다.
동양평화론은 전부 다섯 장으로 나뉘어 있는데, 그 중 머리말과 제1장에 해당하는 전감의 일부분만을 썼을 뿐이고, 그 나머지는 완성하지 못했다.
안중근 의사는 동양평화론을 쓰기 시작한지 10여일 만에 사형을 당했기 때문에 글을 완성하지는 못했지만, 그가 쓰려했던 내용을 통역을 맡았던 일본인 소노키에게 알려주어 그 기록이 남아 있어서, 안중근 의사가 미처 쓰지못한 부분의 내용을 조금이라도 알수있게 되어 무척 다행스러운 일이다.

 

 

 

是母是子 (그 어머니에 그 아들)
안의사의 모친은 안의사에게 사형이 구형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자 두 동생을 급히 여순으로 보내면서 어미의 뜻을 전하라고 했다.
"옳은 일을 하고 받는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다"라고 전하라는 것이었다.
이를 전해들은 한국에서는 대한매일신보에, 일본에서는 아사히신문에 是母是子 (시모시자 :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이라는 글을 실었다.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가 안의사에게 보낸 편지는 실제로 존재하는지 여부는 논란이 되고 있다.
많이 회람되고는 있지만 일본인 사이토 타이켄 주지스님을 통해 유일하게 전해지는 구설일 뿐이라는 설도 있다.
이 편지는 부조벽화에는 적혀있지 않다. 실제로 존재하든 안하든 가슴 먹먹해지는 글임에는 틀림없다. 그래서 빈 공간에 써넣어 보았다.

네가 만약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는 것을 불효라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너 한사람의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것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른 즉
딴 맘 먹지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다.
아마도 이 편지가
이 어미가 너에게 쓰는 마지막 편지가 될 것이다.
여기에 너의 수의를 지어 보내니
이 옷을 입고 가거라
어미는 현세에서 너와 재회하기를
기대치 않으니
다음 세상에는 반드시 선량한 천부의 아들이 되어
이 세상에 나오너라
-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가 안의사에게 보낸 편지

 

 

 

분도(맏아들) 어머니에게 부치는 글
"예수를 찬미하오.
우리들은 이 이슬과도 같은 허무한 세상에서 천주의 안배로 배필이 되고 다시 주님의 명으로 이제 헤어지게 되었으나
또 머지않아 주님의 은혜로 천당 영복의 땅에서 영원히 모이려 하오.
반드시 감정에 괴로워 함이 없이 주님의 안배만을 믿고 신앙을 열심히 하고 어머님에게 효도를 다하고 두 동생과 화목하여 자식의 교육에 힘쓰며 세상에 처하여 심신을 평안히 하고 후세 영원의 즐거움을 바랄뿐이오.
장남 분도를 신부가 되게 하려고 나는 마음을 결정하고 믿고 있으니 그리 알고,
많고 많은 사연은 천당에서 기쁘고 즐겁게 만나보고
상세히 이야기 할 기회가 있을 것을 믿고 또 바랄 뿐이오."
장부 도마 올림
- 1910년 경술 2월14일 부인에게 마지막 편지를 씀

 

 

 

여순 고등법원장과의 담화 중
"나를 보통 살인범으로 판결하는 것은 부당하다.
나는 한국의 독립을 위하여 의병 중장의 신분으로 전쟁에서 적장 이토를 죽였을 뿐이다.
나는 전쟁포로로서 응당히 국제공약에 따라 처리를 받아야지 려순 지방법원의 판결을 받아서는 안된다.
나는 동양평화를 위해서 이토를 사살하였다.
일본은 응당히 이토의 착오적인 정책을 개변해야 한다"
안중근 의사를 면담한 일본 고등법원장은
"그는 비교적 긴 시간 동양평화에 대한 관점과 일본정부를 권고하는 말을 하였다.
그는 마지막으로 나는 한국의 독립을 위하여 헌신을 결심하였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니 상소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 1910년 2월 17일 안의사와 여순 고등법원장과의 담화 중

 

 

 

여순감옥에 수감중 면회 장면이 표현되어 있다.

 

 

 

최후의 유언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르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 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 된 의무를 다하여 마음을 같이 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루도록 일러 다오.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 순국 직전에 정근, 공근 두 아우와 홍신부에게 준 것

 

 

 

동포에게 고함
"내가 한국 독립을 회복하고 동양 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3년 동안 해외에서 풍찬노숙 하다가
마침내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이곳에서 죽노니 우리들 2천만 형제자매는
각자 스스로 분발하여 학문에 힘쓰고
실업을 진흥하며 나의 끼친 뜻을 이어
자유 독립을 회복하면
죽는 자 여한이 없겠노라."

- 순국 직전에 한 유언

 

 

 

안중근 의사의 순국


안의사의 순국
1910년 3월 26일 순국한 안중근 의사는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자신의 몸과 집안을 돌볼 겨를없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고, 이는 한국 독립운동의 방향을 밝혀주는 등불이 되었다.
의거후 152일이 되는 날,
사형선고 후 40일 뒤인 1910년 3월 26일 오전10시에 사형이 집행되어 31살의 나이로 안의사는 순국했다.

 

 

 

순국 직전의 모습
어머니가 지어준 한복을 입고 있는 순국 직전 안중근 의사의 모습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사형집행 전 마지막 소원을 묻자 안중근 의사는
"다 읽지 못한 책이 있으니 5분만 시간을 달라"
그후 5분 동안 책을 읽고 순국하셨다고 한다.

 

 

 

안중근 의사 의거의 역사적 의의
안중근 의사는 조선 왕조 말엽에 태어나 일제의 침략이 나날이 심해지던 대한제국 시대에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애국 지사이다.
안중근 의사의 짧은 생애는 동양 평화를 위한 항일 독립운동이 전부라 할 수 있다.
이것은 지금까지 살펴본 안중근 의사의 의병 활동과 하얼빈 의거, 그리고 사형을 당하기 전까지 보여준 그의 사상과 행동에 잘 나타나 있다.

 

 

 

안중근 의사의 유묵


안의사의 유묵은 대부분이 1910년(경술년) 2월부터 3월 26일 순국직전까지 썼으며 모두 200여점 일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어려서부터 배운 한학을 토대로 선현들로 부터 듣고 배운 문장들을 독창적으로 인용하여 촌철살인의 경구로 구성해낸 것으로 모두 낙관 대신 1909년 2월 동지 11명과 함께 단지혈맹으로 짜른 왼쪽 수인이 찍혀 있다.

 

 

 

國家安危勞心焦思
국가안위노심초사
국가의 안위를 걱정하고 애태운다

黃金百萬而不如一敎子
황금백만이불여일교자
황금 백만냥도 자식하나 가르침만 못하다

見利思義見危授命
견리사의견위수명
이익을 보거든 정의를 생각하고 위태로움을 보거든 목숨을 던져라

 

 

 

恥惡衣惡食者不足與議
치악의악식자불족여의
궂은옷 궂은밥을 부끄러워하는 자는 더불어 의논할 수 없다

一日不讀書口中生荊棘
일일부독서구중생형극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힌다

白日莫虛渡靑春不再來
백일막허도청춘부재래
세월을 헛되이 보내지 마라 청춘은 다시 오지 않는다

 

 

 

안중근공원 시비석 위치도

 

 

 

공원내에는 그밖에도 안중근 의사의 많은 유묵들이 시비석으로 세워져 있다.

 

 

 

天堂之福 永遠之樂
천당지복 영원지락
천당의 복은 영원한 즐거움이다

 

 

 

歲寒然後知 松栢之不彫
세한연후지 송백지부조
눈보라가 친 연후에야 잣나무가 이울지 않음을 안다

 

 

 

人無遠慮 難成大業
인무원려 난성대업
사람이 생각하지 못하면 큰 일을 이루기 어렵다

 

 

 

見利思義 見危授命
견리사의 견위수명
이익을 보거든 정의를 생각하고 위태로움을 보거든 목숨을 던져라

 

 

 

이 유묵은 우리나라 보물 제596-6호로 지정되어 있다.

 

 

 

黃金百萬而不如一敎子
황금백만이불여일교자
황금 백만냥도 자식하나 가르침만 못하다

 

 

 

自愛寶
자애보
스스로를 보배처럼 사랑하라

 

 

 

博學於文約之以禮
박학어문 약지이례
글 공부를 널리하고 예법으로 몸 단속하라

 

 

 

爲國獻身 軍人本分
위국헌신 군인본분
나라위해 몸 바침은 군인의 본분이다
- 보물 제569-23호

 

 

 

一日不讀書 口中生荊棘
일일부독서 구중생형극
하루라도 글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다

 

 

 

안중근 의사의 유묵중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하고 유명한 글이다.
보물 제569-2호로 지정되어 있다.

 

 

 

國家安危勞心焦思
국가안위노심초사
국가의 안위를 걱정하고 애태운다
보물 제569-22호

 

 

 

第一江山
제일강산
삼천리 금수강산 한반도에 대한 사랑 조국애를 나타낸 글

 

 

 

忍耐
인내
그 어떤 어려움도 참고 견디겠다는 독립운동을 향한 의지를 볼수 있다.

 

 

 

위안부 피해자 기림비와 지지않는 꽃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비
슬픈 과거이긴 하지만 결코 잊지 말아야 할 우리의 역사!

 

 

 

일제 강점기 시절,
아직 꽃도 피어보지 못한 어린 소녀로 일본군에 의해 강제로 머나먼 타국으로 끌려가 지옥같은 삶을 살아야 했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한을 달래고 그 아픔을 잊지않고 기억하고자 시민들의 모금으로 이 기림비를 건랍하였다.

 

 

 

지지않는 꽃
2014년 앙굴렘 국제만화축제에서 만화라는 매체를 통해 세계인들의 심금을 울렸던 일본군 위안부피해자 할머니들의 잊혀지지 않는 아픈 삶과 고통!
민족의 영웅 안중근의사...
아들의 죽음을 인내한 어머니의 강직한 모성애...
만화전시를 통해 민족의 아픈 역사를 이야기하고 기억하고자 한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잊을 수 없는 민족의 영웅...
작품을 통해 그의 숭고한 희생을 기억하고자 한다.
- 차성진

오리발 니뽄도
"아이고 어무이 억울해서 나 못죽소
죽어도 나는 예서 눈을 감지 않을테요"
역사적 사실 앞에 진실을 외면하는 군인을 소녀는 똑똑히 지켜보고 있다.
- 이현세

 

 

 

그날이 오면
"이 세상을 떠나기전에 '그 날'이 오기를..."
할머니의 맑은 눈동자에 할머니가 소원하는 '그 날'이 오기를 바라고 있다.
- 차성진

우린 어디로 가고 있는가?
"너무 멀리 온것 같아요... 우린 지금 어디로 가고 있나요?"
그렇게 끌려갔던 우리의 어린소녀들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길을 걷고 있다.
- 최인선

 

 

 

어머니의 편지
"너의 수의를 지어 보내니 이 옷을 입고 가거라"
안중근 의사가 옥중에 있을 당시 그에게 보낸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의 편지를 만화로 표현한 작품이다.
- 박건웅

 

 

 

나라꽃 (무궁화) 역사
영국의 장미가 왕실의 꽃이었으나 국민이 좋아해서 나라꽃으로 정했고, 스코틀랜드 엉겅퀴 가시꽃도 전쟁 중 적군이 엉겅퀴에 찔려 적군을 발견함으로써 승리를 했기에 나라꽃으로 정했다고 한다.
우리나라 무궁화 꽃도 조선시대에는 과거 문무급제때 무궁화 꽃을 사모에 꽂아 임금에게 가서 합격증을 받았다. 이렇게 위대한 무궁화였다. 고려시대 때는 이규보 시 근화로부터 유래되어 무궁화로 불렀다고 기록되고 있다.
무궁화는 일제강점기 동안 우리 민족 말살정책과 함께 다시 등장되었다. 광복과 더불어 독립정부가 들어서면서 대한민국 표상과 상징으로 태극기와 무궁화가 등장 되었다.
위대한 나라꽃(무궁화) 정신이 바로 안중근 의사의 위대한 정신이요, 대한민국과 함께 영원토록 민족의 혼불을 세계에 밝힐 것이다.
-명승희 총재 글

 

 

 

공원 한켠에 피어있는 우리나라 꽃 무궁화는 꽃피는 기간이 7월에서 10월까지 길다고 한다.
먼저 핀 꽃이 지면 다른 꽃이 다시 피고, 그래서 지지않는 이름 무궁화인가 보다.

 

 

 

알고는 있지만 기억하지 않고 있던 사실들...
1945년 8월 15일, 안의사의 바람대로 우리는 빼앗겻던 국권을 회복하고 나라를 다시 찾았다.
하지만 안의사의 마지막 유언은 이뤄지지 않았다.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르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 다오."
어느새 76년이 흘렀지만 안의사의 유해는 찾을수가 없어 지금까지도 고국땅 대한민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안의사의 의거일은 10월 26일로 올해 112주기를 맞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