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 #10 태원전, 집옥재

2012. 3. 23. 23:32+ 카메라를 들고 떠나다/문화유산 답사기

[조선 왕조 제일의 궁궐을 만나다]
경복궁 #10 태원전과 집옥재

카메라를 들고 떠나다 / 문화유산 답사기
서울 종로

Photographed by BayZer™

2012.03.03

 

 

 

경복궁 현황도

 

 

 

집옥재 (集玉齋 Jibokjae)

 

1876년 경복궁에 큰 불이나자 고종은 창덕궁으로 옮겼다가 1888년에 다시 경복궁으로 돌아와 주로 건청궁에 기거했다. 이미 창덕궁에 지어졌던 집옥재, 협길당 등을 1891년에 건청궁 서편으로 옮겨 와 주로 서재와 외국 사신 접견소로 사용했다.

 

 

집옥재 일원
집옥재는 양 옆벽을 벽돌로 쌓고 내부를 중2층으로 만들었으며, 서쪽으로는 팔각형의 2층 정자인 팔우정이 이어져 있고, 동쪽으로는 협길당이 이어져 있다. 이 건물들은 중국풍의 요소들이 많이 섞여 있어 궐내에서 이국적인 지역을 형성하였다.

 

 

집옥재 (集玉齋 Jibokjae)
집옥재는 고종이 서재로 사용하던 곳으로, 실제 이곳에 보관하던 책들은 4만권에 이르렀다고 한다. 원래는 창덕궁 함녕전의 별당으로 지어졌으나 1888년 고종이 거처를 창덕궁에서 경복궁으로 옮기면서 그때 함께 이전되었다. 또 이곳에서 고종은 영국, 일본, 오스트리아 등 외국 사신들을 맞이하기도 했다.

 

 

집옥재 월대
정면에는 월대를 두었으며 가운데에 9층의 계단을 놓았다. 네 마리의 석수가 길게 엎드려 있는 특이한 모습이다.

 

 

석수와 서수상
길게 엎드려 방긋 웃고 있는 듯한 석수의 얼굴이 찾는이로 하여금 미소짓게 만든다. 그 앞으로 서수상을 두었는데, 툭 불거져 나온 동그란 두눈의 서수가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린채 앉아있다. 오른쪽에 것도 똑같이 앉아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서로 마주보고 있는 모습이다.

 

 

답도
가운데 계단인 어계에는 봉황이 아닌 용을 새긴 답도를 놓았다. 이것도 중국풍의 영향을 받은 듯 하다.

 

 

집옥재 현판
옥이 모이는 곳이라는 뜻의 집옥재는 현판이 특이하게 세로로 걸려 있는데, 중국 북송 때의 서예가이자 명필인 미불의 글씨를 집자하여 중국풍으로 만든 것이라 한다.

 

 

집옥재 대청
집옥재는 앞면 5칸, 옆면 3칸의 규모로 지어졌다. 그중 대청은 앞면 3칸, 옆면 2칸에 마루를 깔았다. 대청과 퇴 사이에는 빗살을 정교하게 짠 분합문을 달았다. 그 위에는 호사스러운 무늬들로 치장하였다.

 

 

봉황 문양
대청의 툇마루 왼쪽벽(윗사진)에 있는 봉황의 모습이다. 짙은 채색으로 화려한 모양을 하고 있다. 툇마루 오른쪽벽(아래사진)에도 눈 주위의 채색과 꼬리 모양이 다른 봉황 문양이 있다. 천장에는 용이 있다고 하는데 나중에야 알았다. 구석구석 찾아보면 집옥재는 지금까지의 전각들과 비교해볼때 다른게 너무도 많다는걸 점점 알게 된다.

 

 

용두장식
용두의 모양도 특이하게 청룡을 얹었는데 긴 수염과 뿔, 날카로운 이빨까지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다.

 

 

주련 순서

 

 

집옥재의 주련
灑潤含膏 雲氣多壽 (쇄윤함고 운기다수) : 촉촉히 젖어 기름지니 운기는 장수하게 해주고,
稱物納照 鏡心彌光 (칭물납조 경심미광) : 만나는 사물마다 비추어 주니 거울은 더욱 밝도다.
玉樹陵? 雲煙煥采 (옥수능소 운연환채) : 아름다운 나무가 하늘에 솟으니 안개구름 찬란히 빛나고,
寶花留硏 筆墨生香 (보화류연 필묵생향) : 귀한 꽃이 벼룻가에 머무늬 필묵에 향기가 나도다.
西山朝來 致有爽氣 (서산조래 치유상기) : 서산에 아침이 되니 상쾌한 기운이 이르고,
太華夜碧 人聞淸鐘 (태화야벽 인문청종) : 태화산에 밤 깊으니 맑은 종소리를 듣도다.

 

 

협길당 (協吉堂 Hyeopgildang)
집옥재 동쪽에 복도각으로 연결되어 있는 전각으로서 집옥재와는 다르게 우리 고유의 양식으로 지어졌다. 집옥재의 처마가 일직선으로 되어있는 반면 협길당은 단아하면서 기품이 느껴지는 팔작지붕으로 부드럽게 늘어져 곡선미를 보여준다.

 

 

복도각
집옥재와 협길당을 하나로 이어주는 복도각. 유리를 사용한 창이 협길당의 문과 대조를 이룬다. 그 밑으로는 드나들수 있는 쪽문을 만들었다.

 

 

복도각 뒷면
뒤에서 보니 참 애매해진다. 창호지를 바른 문과 유리가 달린 창, 그리고 벽돌을 쌓은 높은 벽... 하지만 이것도 한 시대를 대표했던 건축물이었다는걸 잊지는 말아야겠다.

 

 

집옥재 동쪽 벽
당시로서는 신식인 중국풍의 서양식으로 지은 것이라 양식과 자재면에서 최신식이었을텐데, 지금 이렇게 올려다보는 느낌은 많은 괴리감이 들게 한다. 한참을 쳐다보고 있자니 숨이 막힐 지경이다.

 

 

협길당 뒷면

 

 

집옥재 뒷면
뒷면 역시 벽돌벽이며 가운데에 만월창을 달아 석재로 테를 둘렀다. 만월창 양쪽으로 두 개씩 아치형의 반월창을 냈다.

 

 

같은 장소에 있지만 협길당과 집옥재의 서로 다름이 한눈에 들어온다.

 

 

굴뚝과 아궁이

 

 

집옥재의 만월창
창이라서 당연히 유리인줄 알았는데 유리가 아니었다.

 

 

팔우정
팔우정은 팔각형의 2층 정자로, 집옥재의 좌측에 복도를 통해 하나의 내부로 연결되어 있다. 8개의 돌기둥 위에 세워져 있으며 1층에는 평난간을, 2층에는 계자각 난간을 설치해 변화를 주었다.

 

 

팔우정
난간 위에는 다시 둥근 돌난대를 돌렸으며, 처마 아래에도 낙양각을 드리웠고, 팔모지붕 꼭지에는 절병통으로 마감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마음껏 치장한 정자이다. 팔우정 뒤쪽으로 보이는 문은 청와대를 볼수있는 신무문이다.

 

 

팔우정 복도각
팔우정은 복도에 있는 계단을 통해 2층으로 올라가 툇마루에 접근하는 구조로 되어 있다. 향원정이 1층 툇마루에서 바로 2층 툇마루로 올라갈 수 있는 것과 다른 점이다.

 

 

뒷쪽에서 바라본 팔우정과 복도각

 

 

광임문 (廣臨門 Gwangimmun)
집옥재에서 서쪽 광임문을 통과하면 경복궁의 북쪽문인 신무문으로 갈 수 있다. 신무문을 나가면 청와대를 볼 수 있으니 그냥 지나치지 말고, 청와대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보자.

 

 

신무문 (神武門 Sinmumun)
신무문은 경복궁의 북문으로 1443년 (세종 15년)에 건립되었다. 신무문의 명칭은 세종이 명하여 집현전에서 지은 것으로 현판은 이현직이 썼다. 조선시대에는 북악산의 성난 기운을 막기위해 늘 닫아두었다고 한다. 신무문을 나갔다가 다시 들어올때는 관람권만 보여주면 된다.

 

 

신무문 천장의 현무
천장에는 화려한 문양의 현무가 그려져 있다. 신무문 쪽은 인적이 드물었으나 왕이 공신들의 충성을 다짐하는 모임이 있는 회맹제에 참석할 때는 이 문을 이용 하였으며, 영조 때에는 숙빈 최씨를 모신 육상궁에 참배하기 위해 신무문을 자주 이용했다고 한다.

 

 

신무문
1961년 5.16 군사정변 후 당시 박정희 정권은 대통령 경호를 빌미로 일반인들의 출입을 금지하고 수도경비 사령부 30경비단을 주둔시키며 신무문을 한때 폐쇄하기도 했었다. 45년 후인 2006년 노무현 대통령때 다시 개방되어 시민들의 품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청와대
신무문을 나오면 북악산 앞으로 대통령의 관저인 청와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많은 사람들이 몰리다보니 경호에 상당한 신경이 쓰이겠다 싶었다.

 

 

청와대
2층의 화강암 석조에 청기와를 덮어 청와대라는 명칭이 유래했다고 한다. 이곳은 일찍이 고려시대에 남경으로서의 별궁이 있던 터였으며, 조선시대 세종8년에는 이곳에 연무장, 융무당, 경농재 및 과거장이 마련되었고, 일제 때는 총독관저가 지어진 곳이다. 1993년 8월 김영삼 전대통령의 지시로 조선총독이 기거하였던 구관이 철거되었다.

 

 

 

태원전 (泰元殿 Taewonjeon)

 

왕과 왕비가 죽으면 빈전(殯殿)에 관을 모시고, 교외에 마련된 산릉에 시신과 관을 묻은 후에는 혼전(魂殿)에 신주를 모셔 정해진 장례기간을 치룬 후에 종묘로 신위를 옮겨 모시게 된다. 태원전은 경복궁의 빈전으로 건립되었다.

 

 

일중문 (日中門 Iljungmun)
신무문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다가 장고에서 우측으로 가면 태원전이 있다. 장고, 향원정, 집옥재 등 태원전의 동쪽에서 오게되면 첫 번째로 만나게되는 문이다. '해가 하늘 한가운데 온다'는 뜻으로 일제 강점기에 훼손된 것을 2005년 복원하였다.

 

 

태원전 담장
일중문에서 본 담장으로 안과 밖에는 푸른 소나무가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태원전 일원
일중문을 들어서면 태원전 영역의 건물들과 담장들이 보인다. 태원전 주변으로 공묵재, 영사재 등 상례용 건물들이 들어서 일곽을 이루고 있는데, 이곳은 일제강점기때 철거를 겪고 한때 청와대 경호부대가 주둔하는 등 변화를 겪었다. 2006년 이 일대의 복원공사가 마무리되어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건숙문 (建肅門 Geonsukmun)
태원전으로 들어가는 남쪽의 첫 번째 문으로 2005년에 복원되었다. 1872년 (고종9년) 영희전에 있던 어진을 태원전으로 이봉할 때 건숙문을 내외의 신문으로 삼았다.

 

 

건숙문
엄숙함을 세운다는 뜻의 건숙문은 태원전으로 가는 첫 문이기 때문에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엄숙함을 강조한 듯 보인다. 삼문형식인 건숙문 앞에 경안문이 보인다.

 

 

경안문 (景安門 Gyeonganmun)
건숙문을 지나 만나게되는 두 번째 문으로 삼문 형식으로 되어 있다.

 

 

경안문 현판과 행각
'경안'은 크게 평안하다는 뜻이다. 경안문에서 태원전까지 행각으로 이어져 있는 특이한 모습을 볼수 있다.

 

 

행각
경안문에서 태원전 앞까지 사각 전돌을 깔고 그 위에 맛배지붕을 얹은 행각을 연결했다. 단정하고 엄숙한 외관을 갖추고 있다.

 

 

태원전 (泰元殿 Taewonjeon)
경복궁의 서북쪽 일대는 빈전(殯殿)이나 혼전(魂殿), 영전(靈殿) 같은 제사와 관련된 전각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빈전은 왕실에 돌아가신 분이 있을 때 관을 모셔두는 곳이고, 혼전은 종묘에 모실 때까지 만 2년 동안 위패를 모시는 곳이며, 영전은 돌아가신 분의 초상화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태원전은 국상을 치르는 동안 상여가 나가기 전까지 관을 모셔두었던 빈전으로 사용되었으며,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초상화를 모셔두기도 하였다.

 

 

태원전 현판
'태원'은 하늘을 뜻한다. 국장때 시신을 안치하는 곳이므로 '하늘'이라는 존칭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태원전과 행각
고종 때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지어졌으며 20세기 초에 철거되었다가 2005년에 옛 모습대로 다시 복원되었다. 이곳은 궁의 서북쪽 외진 곳에 위치하고 있어 한적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좌측에서 본 태원전

 

 

태원전 합각

 

 

건길문과 영사재
태원전 동쪽으로 이어지는 영사재는 건길문을 통해 들어가도록 구분을 두었다.

 

 

건길문 (建吉門 Geongilmun)
영사재로 들어가는 문으로 2005년 태원전을 복원하면서 만들어졌다. '건길'은 복을 세운다는 뜻으로 고종 때 중건 당시 만들어진 현판을 달았다. 동쪽에서 영사재로 들어가는 문인 대서문이 안쪽 우측에 있다.

 

 

영사재 (永思齋 Yeongsajae)
태원전 동쪽에 붙어있는 건물로 내부가 통하는지는 모르겠다. 기단을 태원전보다 낮게하여 격식을 낮추었으며, 상례용 건물로 쓰였다. 정면 6칸중 가운데 2칸은 개방된 마루로 만들었다.

 

 

영사재 현판
'영사'란 오래도록 생각하고 가슴속에 새겨둔다는 뜻으로 돌아가신 분을 오래도록 그리워함을 나타냈다.

 

 

대서문 (戴瑞門 Daeseomun)
영사재로 들어가는 동쪽 문으로 '대서'란 상서로움을 간직한다는 의미이다. 2005년 태원전을 복원하면서 같이 만들었으며 고종 때의 현판을 달았다.

 

 

남쪽 행각
태원전의 남쪽 행각으로 경안문에서 동쪽으로 이어지는 행각에 경사합이 있고, 다시 북쪽으로 꺽어지는 부분에 유정당이 있다.

 

 

경사합 (敬思閤 Gyeongsahap)
태원전 남쪽 행각의 건물로 2005년 태원전을 복원하면서 함께 만들어졌다. '경사'란 공경히 생각한다는 뜻으로 돌아가신 분을 공경히 생각하는 공간으로서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유정당 (維正堂 Yujeongdang)
'유정'은 바른 마음을 가진다는 뜻으로 심신을 바르게 하여 돌아가신 분을 생각하는 공간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태원전 동쪽행각의 건물로 2005년에 복원되었다.

 

 

태원전 남쪽 행각
경안문에서 서쪽으로 이어지는 행각의 모습.

 

 

공묵재 (恭默齋 Gongmukjae)
태원전의 남쪽 첫 번째 문인 건숙문 우측으로 공묵재의 남쪽담장이 이어지며 그 안에 공묵재가 자리잡고 있다. 고종은 태원전 재실인 공묵재에 머물면서 신하들을 만나보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2005년 태원전을 복원할 때 같이 복원하였다.

 

 

공묵재와 보강문 (保康門 Bogangmun)
건숙문에서 동쪽으로 들어서면 보강문이다. 일중문으로 들어올때는 홍경문을 통하면 공묵재로 갈 수 있다.

 

 

숙문당 (肅聞堂 Sukmundang)
'숙문'이란 엄숙하게 듣는다는 뜻으로 혼령의 말씀을 엄숙하게 듣는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태원전 서북쪽 담장 끝에 있는 3칸짜리 집이다.

 

 

우물
태원전에는 총 3개의 우물이 있다. 그중 하나는 태원전 동쪽에 위치해 있으며 일중문을 들어서면 보인다.

 

 

 

 

 

 

 

 

 

 

 

 

일중문으로 태원전을 나선다.

 

태원전을 마지막으로 10편의 경복궁 답사기를 마칩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하고 고맙습니다~^^